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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Sep 12.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12

내 작은 마을

2016.09.18

Goslar / Hildesheim, Deutschland


 K와 터키남자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짐을 챙겨 나갔다. 6인실이 텅 비어 잠깐이지만 독방이 되었다.

 자유 아닌 자유를 만끽할 새도 없이 부랴부랴 외출을 준비했다. 오늘의 목표는 근처 소도시인 고슬라다. 나의 목표는 <카이저팔츠>로 11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지은 성을 보존하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예전에 광산업으로 유명했던 도시이기에 관련된 투어도 해보고 싶었지만 급하게 예약하려니 번잡스러워 결국 박물관과 성당만 보고오기로 마음먹었다.


 니더작센주(州)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는 티켓을 끊고 열차를 기다렸다. 분명 쾰른까지는 반팔 옷이 딱이었는데 북쪽으로 좀 더 올라왔다고 날이 쌀쌀해졌다. 생각보다 낮은 기온에 두꺼운 옷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달달 떨며 올라탄 열차는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없어서 잠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1시간가량 달려서 도착한 마을은 굉장히 조용했다. 하필이면 일요일에 나온 덕에 전 마을이 휴식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30분가량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날이 개고 있었지만 아직은 구름 낀 하늘 위에는 햇살의 흔적이 미미하다. 추위에 눈앞에 나타난 성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겉으로는 잠겨 보였는데 조용히 열린 문 안에는 소란스러움이 가득하다.


 미사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 기분을 느낀다. 성당을 슬쩍 둘러보자 나처럼 이방인 티를 팍팍 내는 사람들이 보인다. 거진 관광객일 터였다.

 길을 잘못 들어 1시간이 넘게 길을 헤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목적지를 찾아 들어갔다. 

건물로 들어갈 때만 해도 날씨가 흐렸다


 잠깐 성당에서 몸을 녹였다 해도 다시 마을을 쏘아 다니느라 몸이 다시 차가워졌다. 구름이 슬슬 걷히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어두운 날씨에 부지런히 발을 놀려 건물로 들어갔다.


 독일을 여행하다 보면 옛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인지 황제나 카이저의 흔적을 왕왕 보게 된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에게 독일은 철학과 전쟁의 나라였다. 그 무엇보다 인문학적 고찰에 앞서가던 나라가 반인륜 전쟁범죄의 대명사를 낳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와본 독일은 근대의 짧은 역사로 매도되기에는 아쉬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히틀러는 융커라 불리는 기존 엘리트장교들을 증오했지만 어쩌면 독일이란 나라는 군인과 장교들의 정신으로 수백 년간 쌓아 올린 '군인들의 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그들에게는 몇 백 년 동안 유럽 최강의 군대를 유지한 비법이 있지 않았을까.

 

 내부를 구경하고 나오니 커다란 구름들이 쪼개지고 햇살이 나오기 시작했다. 파랗게 개인 하늘아래 언뜻언뜻 마을이 비쳐 보였다.

 저 위에서 이 풍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 이 높이에서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더 높이 더 멀리 내다보았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그리고 그 땅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나를 따르는 이들이 그 도시에 가득했다면 어떤 고양감을 느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질문에 답을 해줄 만한 이는 지하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도 대단했던 군주는 천년이 조금 덜 되는 시간이 지나 세계각지에서 제 무덤을 '관광'하러 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은 쪼글쪼글해진 심장만 남은 황제보다는 그곳에 같이 순장되었다는 가여운(그러나 사랑받았을) 개의 동상을 더 유심히 쳐다본다는 것도 상상해 봤을까? 이번 질문에는 당연히 '아니'라고 스스로 답 할 수 있었다.

밖을 나오니 날이 개고 있었다

 

 날씨 좋은 날은 어딜 가도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낸다. 그때마다 나는 자연광의 힘을 느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건물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단해 보였고 갈색벽돌로 지은 커다란 집은 성보다는 학교나 기숙사에 가까워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사람들을 보니 그런 감상이 더 강해졌다.


 성을 뒤로하고 또다시 걸었다. 흐린 날이 점점 개어가며 마을 곳곳에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고슬라의 성은 오랜 시간 기억이 날듯했다.


 점차 빛이 차오르고 조금씩 따뜻해져 가던 작고 사랑스러운 마을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먼지 쌓인 책장 같았지만 조금씩 분명하게 움직이던 그 거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고슬라. 유럽여행에서 만난,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혀버린 작은 마을이다.


 숙소를 가기 위해 역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뒤를 돌아보고 사진을 찍고, 부러 길을 뱅 둘러 왔더니 열차가 5분 전에 떠나 있었다. DB앱으로 확인하니 다음열차는 한 시간 뒤에나 있었다. 결국 밍기적 거리느라 이 날씨에 역 벤치에서 한 시간을 보내게 생겼구나 싶었다.

 다시 마을을 다녀오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애매했다. 혹시나 또 열차를 놓치게 된다면 더 추운 1시간을 보내야 할 터였다. 어찌할지 고민하다 어제 시간이 남으면 가볼까 했던 도시가 생각났다. 


 하노버와 고슬라사이에 위치한 힐데스하임이 그 주인공이다. 이미 3시가 넘어간 시간이라 가서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겠지만 이왕 교통권도 끊은 거 가는 길에 들르기로 결정했다.

 목표는 1022년(!)에 지어진 성 미하엘 교회였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이 건물은 건물 자체도 유산이지만 내부에 천장화가 유명했다. 13세기의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아름다운 천장화가 있었는데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아래에 거울을 비치해 고개를 들지 않고도 관람이 가능했다.

 

 차피 가는 길이라 큰 부담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길이라 생각하니 기다림이 조금은 덜 지루해졌다.

 50여분을 기다려 기차에 올라탔다. 햇살이 있어 버티긴 했지만 바람이 차가웠던 터라 바람 없는 실내가 달가웠다. 40여분을 또 달려 힐데스하임 중앙역에 도착했다. 5시가 다 되어가는데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마을을 구경하며 목표로 했던 교회로 다가가 유네스코 마크를 찾았다. 여행을 하며 종종 봐오던 것인데 오늘은 사진으로 남겨두고파 부러 찾아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 뿌듯해서 웃고 있다 보니 옆에서 노숙인 한 명이 뭐라 뭐라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 뭉개진 독일어를 알아들 방도가 있나. 후다닥 교회로 들어갔다.

 괜히 양심이 따끔거리고 고질병인 착한 아이 병이 도진다.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데'와 '무서워'가 충돌한다. '여기서는 내가 나를 지켜야 해'. 가장 커다란 명분을 내세우니 착한 아이가 조용해졌다.


 교회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러나 그게 투박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작은 트롤리처럼 보이는 거울을 끌고 오니 천장의 벽화가 쏟아져 내렸다. 금빛 찬란한 그 그림들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한국에 가면 성경을 다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여태까지 다 안 읽었다.)

 미라 같은 예수가 걸린 그곳에서 무언가 찾지는 못했지만 낮에 본 황제의 무덤과 성자의 무덤이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라 신기했다. 아마 사람의 드나듦의 차이일 듯하다. 


 교회를 둘러보고 설렁설렁 걸어 나와 중앙역으로 향했다.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열차시간에 맞추어 딱 한 시간만 도시를 구경하고 나왔다. 의도한 것보다 헤매었지만 그래도 용케 제시간 안에 역사에 들어왔다.

 아침과 달리 날씨가 워낙 좋아진 터라 짧은 머무름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해가 지고 숙소에 들어갈 배짱은 (아직) 없었다. 또다시 30분을 달려 하노버에 도착했다.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석양이 함께하니 새삼 며칠간 횡보한 거리가 낯설었다. 


 5층의 숙소는 풍경이 좋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다. 한참 뺑글뺑글 열반의 길을 올라 방으로 입성했다. 새로운 룸메이트들은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었다. 둘이서 재잘거리는 게 즐거워 보였지만 딱히 친하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의 두 개의 도시는 조금 벅찬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그야말로 '들린'것임에도 열심히 걷고 달달 떨었던 몸이 오늘은 그만 쉬라며 나를 재촉했다. 씻고 침대에 들어가니 그저 눕고 싶었다. 대충 내일 계획을 세우고 누웠다.

 

 소란스레 떠들며 나갈 것 같았던 남자 둘은 의외로 일찍 자리에 누웠다. 불을 꺼도 되냐 묻길래 답을 하고 시간을 보았다. 8시 반이다. 분위기는 술 마시고 새벽 4시까지 춤출거 같은데 놀라울 정도로 이른 시간에 불을 끈다.

 

"Good night, princess"

 프린세스라는 단어에 나한테 한 건가 놀라기도 잠시 "Good night"이라 대꾸하는 일행의 목소리에 그냥 서로 공주라 부르는구나 싶어졌다. 그러다 바로 이어지는 "You too. Prince"라는 말에 잠이나 자자 싶었다.

 말도 거의 안 섞은 사람에게 누워서 "잘 자, 공주야"를 건넬 수 있는 인간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능청스러움이 조금 부러워졌다.

공주와 왕자가 잠들던 방의 전경

 2화 만에 다시 쉬어가는 게 민망하지만 추석 연휴인 16일은 쉬어갑니다.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유럽 일기 13화는 연휴가 지나고 19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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