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인연이겠지
2016.09.20
Berlin, Deutschland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캐리어를 정리했다. 혹시나 놔두고 가는 것이 있을까 침대를 훑어보고 전날 말려놓은 수건도 잘 챙겨 넣었다. 지갑과 여권도 잘 챙기고 5층 계단을 낑낑거리며 내려왔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엽서를 보낼까 했는데 아쉽게도 우편기계가 고장 나 있었다. 엽서 때문에 부러 일찍 나왔건만, 아쉬웠지만 쫓기는 것보다는 여유 있는 게 났다 생각하기로 했다.
매번 익숙해질 때쯤 이동하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여행이란 원래 이런 것 같다. 낯섦이 사라지고 편해질 때쯤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이고 나아간다. '정착'이라는 말이 내가 있는 땅을 다듬는다는 뜻이라면 '여행'은 내가 가는 길을 다듬는다는 뜻 같다.
열차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만든 소란으로 시끄러웠다. 다행히 맞은편에 앉은 신사분은 조용히 할 일을 한다. 방해가 될까 봐 사진을 찍던걸 멈추고 눈으로 풍경을 담았다. 지평선과 숲, 넓은 밭과 말아놓은 지푸라기 따위들이 왜 이리 재밌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베를린에 당도했다. 중앙역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로 갈아탔다. 이곳의 버스와 트램은 계단이 없어 캐리어를 움직이기 수월했다.
"가장 불편한 사람에게 맞춰라 그럼 모두가 편하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또 흔히 말하는'선진국'인 나라들을 여행하며 느낀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대중교통은 불편하다. 노선이나 배차간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비스를 이용할 때의 접근성에 대한 것이다.
휠체어나 유아차가 쉽게 오를 수 있는 전철과 버스, 실제로 사람이 상주하고 있는 안내창구 등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은 꼭 당사자가 아니라도 편리하다.
가장 불편한 사람이 이동하기 편해지면 평균의 사람들 역시 그 혜택을 받는다. 16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치 숙소를 구한 것은 아주아주 운이 좋았다.
내가 베를린에 도착할 때즈음으로 마라톤과 행사가 개최되는 바람에 온 도시가 정신이 없었다. 하노버에서 숙소를 알아볼 때 내가 갈만한 호스텔은 이미 다 나갔고 도전해 볼 만한 저렴한 호텔도 방이 없어 눈앞이 아찔했다. 급하게 계획을 수정하려 해도 영 마음에 드는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베를린은 내가 독일여행을 계획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도시이고 이제 와서 왔던 길을 돌아가 하노버나 쾰른에 더 시간을 쏟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하룻밤에 30만 원씩 태우자니 이제야 겨우 예산 범위로 돌아온 지출과 가벼운 지갑이 걸렸다. 쾰른에서 같은 문제로 머리를 싸매놓고 다시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게 참으로 바보 같았지만 별 수 없었다. 이게 내 유럽여행이었다.
끙끙거리며 머리를 뒤집고 찡찡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가 K와 같이 밥을 먹은 날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K는 흔쾌히 나를 자신의 기숙사로 초대해 줬다.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K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고 룸메이트 중 한 명의 자리가 비어 하루정도는 나를 재워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가는 게 룰을 어기는 게 아닌가 싶어 물어보니 원래 빈침대에는 친구를 초대할 수 있다며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하루 만난 나의 뭘 믿고 방으로 초대해 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침대가 작고 다른 룸메이트가 한 명 더 있는데 그래도 괜찮냐는 K의 물음에 나의 대답은 당연히 예스와 땡큐였다.
그렇게 나는 K덕에 하룻밤을 해결했다. K의 기숙사로 도착한 나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고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둘 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K를 만나고 짐을 풀 수 있었다. K의 기숙사는 하나의 플랫을 여러 명이서 공유하고 있었는데 나는 K가 지내는 제일 큰방의 침대에서 신세를 졌다. 또 다른 룸메이트인 A 역시 친절했다. 다만 그것이 편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때로는 내 돈 주고 자는 남의 집이 진짜 "남의 집"보다 편하다. 하하.
숙박등록을 위해 기숙사 관리동으로 향했다. 내 여권을 복사하고 서류에 사인하니 나는 당당한 숙박객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학생이 아닌 내가 기숙사에 머무는 게 진짜 괜찮은지 걱정되었지만 아예 서류에 사인하고 여권까지 복사에 가져가니 안심되었다.(별개로 내 여권정보를 잘 파기해줄까 싶긴 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K는 금방 가봐야 한다 했고 6시 이후에 돌아온다고 했다. 나 역시 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에 그 시간에 맞추어 기숙사로 돌아오기로 했다.
오늘 하루 K의 방에서 신세 지고 내일은 대학도시인 할레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3박 4일 동안 그 도시에서 머물다 다시 베를린에 돌아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다시 베를린에 돌아온다고 오늘 하루를 멍 때리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목표를 정하고 길을 나섰다.
웅장한 브란덴부르크 옆으로 커다랐고 네모난 시멘트 덩어리들이 놓여있는 공간이 있다. 마치 거대한 석관이나 건물의 잔해같이 보이는 회색의 돌들이 나의 목적지다.
커다란 크기만큼 관광객들로 가득 찬 브란덴부르크를 지나고 옆으로 빠지니 거리가 한산해졌다. 오기 전에 미리 사두었던 납작 복숭아를 먹으러 공원으로 향했다. 관광마차와 거리의 예술가들이 사라지고 조금 더 조용한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와 딱 한 블록 차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푸릇푸릇한 공원과 시원한 바람과 달달한 복숭아가 너무 좋았다.
공원을 나와 5분 정도 걸으니 오늘의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홀로코스트 추모장소는 멀리서 보기에는 평탄한 돌로 가득 찬 공원처럼 보였다. 초입 부분의 돌들은 언뜻 보기에는 낮고 작아서 벤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안으로 향할수록 돌은 급격히 커지고 높아져 성인 남성조차 고개를 들어야만 끝을 볼 수 있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가도 짙어지는 그림자에 무심코 옆을 돌아보면 어느샌가 거대한 돌들이 빼곡히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이다.
안쪽으로 이동해 지하에 있는 박물관을 방문했다. 입장까지 약간의 기다림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만한 시간이었다.
공항 검색대와 비슷한 보안검사를 거치고서 박물관에 입장했다. 초입부터 걸린 안내판을 찬찬히 읽으면서 걸어 내려갔다. 추모비와 박물관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100년도 되지 않은 끔찍한 역사가 아프고 슬프고 괴로웠지만 그 역사를 읽고 있는 장소가 독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고 부러웠다.
독일은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다.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행위들을 저지른 가해자의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오점을 수도 한복판에 박아 넣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들이 그만큼 반성해서? 피해자인 유대인들의 힘이 강력해서? 세계의 시선들이 두려워서? 무엇이 이들을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놀랍고, 신기하고, 부러웠다.
이 장소에서 다른 전범국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건 아둔한 사람일터다.
도쿄 한복판에 이토록 거대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령비가 세워질 수 있을까? 의사당 근처에 넓은 땅을 다지고 그곳에서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참회하고 방문객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을까?
사과와 반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진 게 많을수록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버티면 버틸수록 더 어려워진다.
박물관의 모든 안내문에는 영어가 빽빽이 적혀있다. 그전 관광지에서는 찾는 것도 힘들거나 있어도 한 두줄이었던 영어설명이 가득하다. 그렇게 그들은 보여줘야 할 대상이 세계라는 걸 말하고 있다.
눈가가 아파오고 콧대가 시큰해졌다. 떠듬떠듬 읽어 내린 비극들이 가슴에 쌓여 숨이 막혀왔다. 침묵 속에서 간간이 들리는 훌쩍임이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라 말해준다.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박물관의 작은 방이 있다. 공간을 끊임없이 채우던 희생자들의 이름들. 성우가 낮은 목소리로 읽어주던 그 이름들을 다 들으려면 몇 년이나 필요한지. 그리고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피해자들은 얼마나 더 많은지.
어디에서나 살기 힘들어질 때 남을 탓한다. 타인을 원망한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단지 기억해 두자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나의 양심이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 틀린 일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