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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Sep 30.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16

빛나는 밤에

2016.09.22

Halle (Saale), Deutschland


 어리다는 것에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어지간한 잠자리는 다 버틴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도 푹신해 보였던 소파베드는 만족스러웠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게으름을 피운 아침을 보내고 J의 도움으로 도시구경을 나섰다. 더 정확히 말하면 J의 일정에 따라붙었다. 유학생인 그를 따라 도시를 구경하고 학교에서 외부인의 출입이 허가된 곳도 따라 들어가 봤다. 처음에는 도시 전체가 학교라는 게 감이 잘 안 왔지만 조금 걷다 보니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물들이 다 학교였다. 학과동, 강의실, 기숙사 등 조금 크다 싶은 건물은 죄다 학교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오래된 집이라 생각했는데 강의동이고 조금 세련되었나 생각하니 학과사무실이다.

 도시에 넓게 포진되어 있는 강의실이 꽤 낭만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사용자인 J는 단점도 많다며 고개를 저었다.

 짧은 도시구경을 마치고 J의 볼일을 위해 사무동으로 들어갔다. 순서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J는 독일 학교생활과 독일이란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대부분은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종종 나오는 유학생활의 즐거움에 듣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서류와 절차의 나라답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손에 서류를 한 뭉탱이씩 들고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쉽게 줄어들지 않는 대기줄에 살짝쿵 지루해질 때쯤 J의 지인을 만났다.

 J의 친구의 여자친구인 E는 지루한 대기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하는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 셋이 모였으나 사용언어는 그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채택되었다. 떠듬떠듬 내용을 따라가고 말이 막힐 때는 J를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나의 캐리어가 주제에 올랐다.


 보기보다 무거웠던 나의 캐리어는 큰 이모의 협찬으로 얻게 되었다. 쨍한 파란색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돌돌이(애칭)는 이모가 이렇게 큰 캐리어는 안 쓴다며 나에게 쾌척해 준 선물이었다. 캐리어에 대해서는 별생각 없었던 나는 '땡큐' 하고 캐리어를 받아 짐을 쌌다. 눈앞에 캐리어를 두고도 용량이 28인치인지 32인치인지도 몰랐던 나는 나름대로 캐리어를 알차게 꾸렸다 생각했다. 본인의 힘으로 숙소 계단을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하...


 생각보다 무거운 나의 캐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나름대로의 항변을 하고 있었다. 옷무게를 줄이기 위해 적은 양만 가져온 것, 다수의 옷이 원피스라 돌돌 말아 넣으면 부피차지도 적었다고 열심히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다만 생각보다 날이 추워 카디건을 안 가져온 걸 후회한다는 말도 꺼냈다.


 J는 9월에 독일에 와서 12월에 가는데 원피스만 가져오면 어떡하냐 타박했고 자신의 동지라 생각한 E에게 동의를 구했다. E 역시 J와 비슷한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답이 뜻밖이었다.

 "원피스가 뭐야?"

 당황스러운 한마디에 나와 J 둘 다 말문이 막혔다. 원피스는 원피스 아닌가? 그러니까 E가 입고 있는 하얀 꽃무늬옷이 원피스인데? 동시에 막혀버린 말문에 우리 세명 사이에서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J가 다시 "원피스"라고 혀를 굴려보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서로 멀뚱히 바라보다 웃음이 터졌고 그냥 "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 같은 것"이라고 정리했다. 때마침 J의 순서가 다가왔기에 그 주제는 흐지부지 되었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외래어가 많지만 그 단어가 원어의 의미와 똑같이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여행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원피스라는 단어대신 드레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내 머릿속에서 드레스는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파티복이었기에 그게 그리도 신기했다.

 

 기다린 것에 비해 짧은 볼일을 마치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엽서를 부치고 J가 자주 가는 아시안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학생들이 많은 곳의 장점은 저렴한 맛집이 많다는 것이다.

날아다니던 밥알과 넘치던 기름에도 불구하고 맛은 좋았다.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 계획을 짰다. J는 친구와 농구를 한다며 나가고 러시아 룸메이트는 보기보다 낯을 가리는지 내가 온 뒤로 여자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 책을 보다가 나도 집을 나섰다. 떨어진 소모품을 구매하고 식량도 살 겸 근처 마트와 DM을 방문했다.

 DM은 독일의 드럭스토어로 한국의 올리브영과 편의점을 합친 느낌의 상점이다. 관광객들은 기념품을 위해 들리지만 오늘 나의 목적은 렌즈와 치약이었다.


 한국에서부터 렌즈를 껴보고 싶었는데 그동안은 무섭기도 하고 대용량 포장이 부담돼서 쉽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내 렌즈경험은 중학교 때 친구들끼리 "돌려쓰는"(무시무시하게도 내가 학생 때 친구끼리 컬러렌즈를 돌려쓰는 건 흔한 일이었다.) 컬러렌즈가 전부였다.

 중학생 때 처음 껴본 렌즈는 따갑고 불편해 한번 껴보고는 쳐다도 보지 않았었는데 시력이 나빠지고 안경이 무거워짐에 따라 나의 렌즈 흥미도는 최고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착용 경험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한국에서 한 팩에 2만 원이 넘어가는 렌즈를 선뜻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짝눈이라 도수도 다른 터라 실패할 경우 리스크가 두 배였다.

 그런 나에게 DM에서 파는 렌즈는 아주 좋은 입문이었다. 한달짜리 렌즈가 개당 3천원꼴에 판매되고 있던것이다. 내 도수에 맞게 하나씩 골라도 만원이 안 되는 가격이라니! 독일 올 때부터 다른 건 몰라도 꼭 도전해보고 싶은 제품이었다.

 신나게 DM으로 들어가 렌즈와 치약을 들고 나왔다. 내일 외출에 첫 개시를 해보자 마음먹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뿌듯한 포획물


 DM을 나와 근처 작은 마트로 향했다. 매번 대형마트만 가다가 동네 마트 같은 곳을 가게 되니 이게 뭐라고 또 재밌었다.


 독일에서 장을 볼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농산물을 구매하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구매자가 봉투에 원하는 만큼의 물건을 놓고 직원을 찾아 무개를 잰 다음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다. (요즘은 셀프 계산대가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아는 방법은 직원을 찾는 것이었기에 나도 당연히 독일에서 직원을 찾았다.)

 그러나 독일은 캐셔가 계산대에서 무개를 재는 것과 동시에 계산했다. 간혹 가다 셀프 측정대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캐셔에게 들고 가면 해결되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이 되어서는 자두 한 알을 덜렁 들고 계산대로 갔다.

 이번에도 가게로 들어가 물건들을 골랐다. 샴푸나 휴지 따위를 고르고 과일코너로 가 바나나도 하나 손에 쥐었다. 

 익숙하게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고 돈을 준비하는데 캐셔가 말을 걸어왔다. 여행을 하며 캐셔가 말을 걸었던 적은 휴대폰을 충전했을 때뿐이라서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뭐지? 나 술 안 샀는데? 여긴 멤버십도 없는데? 왜 말을 걸지? 멍 때리는 나를 보며 캐셔가 바나나를 흔들어 보였다.


 어려 보이는 남자직원은 저의 머리색과 똑 닮은 바나나를 흔들며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여전히 무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둘 다 난감해할 때 드디어 직원의 입에서 영어 단어가 튀어나왔다.

 "where?"

 그제야 바나나를 팔던 매대가 두 군데 있던 게 떠올랐다. 열심히 내가 고른 바나나가 있던 곳을 설명했다. 그러나 직원도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했던 터라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은 내가 설명 한 방향으로 매대를 찾아가 보고서야 내 바나나의 가격을 입력할 수 있었다. 번거로운 일임에도 가격을 보고 온 직원은 웃고 있었다. '독일인이 이렇게 자주 웃어주나?' 싶을 정도로 웃으며 '당케'를 말하던 직원이 너무 고마웠다. 나 역시 연신 쏘리와 땡큐를 외치며 우리는 기나긴 계산을 마쳤다.


 저녁으로 사 온 바나나를 먹으며 언어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도시의 분위기 때문인지 하면 될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여행을 하며 웃음과 몸짓으로 해결되는 일들도 많았지만 역시 나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려면 말이 필요했다. 


 늦은 저녁 J가 돌아오고 우리는 다시 집을 나섰다. 그동안의 여행동안 혼자 다녔던 터라 포기했던 야경을 위해서였다.

 혼자서는 안전을 위해서 포기했었지만 찾아온 기회까지 날리기는 아까웠다. J는 같이 야경을 봐줄 수 있냐는 말에 이곳의 야경은 특별하지 않다고 우려했지만 내가 애초에 유럽 야경을 못 봤다 말하니 흔쾌히 밤 산책에 동행해 주었다.

 

 할레는 작은 도시였지만 충분히 예뻤다.

 야경이란 것은 어디서나 반짝거린다지만 처음 본 유럽의 밤거리는 나의 의미를 먹고 더욱더 반짝였다. 카메라에 담을 생각도 못하고 밤거리를 구경했다. 배경들이 지워지고 중요한 점 하나만 반짝거리는 세상은 어둡고도 아름답다.


 일행까지 있으니 어두운 골목도 무섭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일행이 길까지 잘 아는 사람이니 어깨가 든든했다. 낮에 돌아다닌 곳들은 극히 일부였는지 이곳은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노란빛을 배경으로 거리를 가로지르는 트램은 이제껏 어디보다 "유럽"스러웠다.


 조용하고 약간은 지루한 도시, 그래도 결코 작거나 착하지만은 않은 도시. 빛을 받아 반사하는 회색 건물들이 제 미모를 내뿜는다. 유럽의 야경을 이제야 본다. 이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두 눈에 꼭꼭 씹어 넣는다. 걷는 것만으로도 좋고 어딜 봐도 좋다.


내일은 또 어떤 것들을 보게 될까.


 야경사진을 첨부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뒤져봤지만 살아남은 사진이 없어 너무나 아쉽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그 지루할 만큼 뻔했던 야경이 정말 예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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