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로와 파인애플
2016.09.24
Berlin, Deutschland
며칠간 내 침대가 되어준 소파와 이별하고 J의 집을 나왔다. 인사를 건네고 3일 전 J와 왔던 길을 혼자 되짚어갔다. 조금 일찍 나왔음에도 중앙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버스에 미리 올라타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삼다수를 마셨다. 청량하고 깨끗한 맛이 너무 그리웠었다. 이제껏 물을 탄다는 생각은 없이 살아왔는데 그건 내가 외국 여행을 안 가봐서 하는 소리였다. 독일에 오니 이곳의 물은 맛이 없었다.
다행히 피부에 두드러기가 난다거나 속이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맛이 없었다. 한평생 화산섬 지하 암반수만 먹고살던 나에게 독일의 석회수는 비리고 느끼했다. 물이 느끼할 수도 있다는 걸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처음 캐리어를 쌀 때 500ml 생수를 몇 개 챙겼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저렴한 생수나 마트 PB 물이 맛없다 느꼈기에 혹시나 싶어 보험용으로 넣어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비록 첫날 숙소 계단을 올라가면서는 죄다 버리고 싶었지만.
조금은 후덥지근했던 버스가 시동을 켜고 사람들을 부지런히 태웠다. 베를린까지 2시간 동안 짧은 잠을 자기로 했다.
큰 차들이 대개 그렇듯 승차감이 좋았다. 잘 빠진 도로를 달리며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잠보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중간에 화장실도 알차게 사용했다.(문을 못 열어 갇힐뻔한 건 덤이다.)
화장실도 있고(냄새는 심했지만) 내 키로는 좌석에서 발도 쭉 펼 수 있었다. 심지어 시트를 뒤로 젖혀 누우면 간의 침대 사이즈가 나왔다.
이런 차는 가격이 얼마나 할까? 만약 내가 돈이 많고 운전을 잘한다면 큰 차를 몰고 여행을 다녀보고 싶다. 덜컹이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동네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이렇게 부드러운 시트에서 자면서 대륙을 누비면 얼마나 즐거울까.
언뜻 들어본 캠핑카의 가격은 무서울 정도였지만 상상은 자유였다.
한번 와봤다고 눈에 익은 정류장에 도착했다. 역시나 한번 해봤다고 자신 있게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탔다.
이번 베를린 숙소는 외곽에 있는 호스텔이었다. 마라톤의 여파인지 아직까지도 메인거리의 숙소들은 가격이 비싸거나 방이 없었기에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일주일 넘게 머무를 예정이기에 연박을 찾는 건 더 힘들었다. 겨우 찾은 숙소도 하루는 6인실에서 자고 내일 방을 4인실로 옮겨야 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숙소가 외곽인 건 알았지만 역에서도 꽤 떨어져 있어서 길을 찾는 게 험난했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도를 새로고침 하면서 길을 찾았다. 약 20여분의 사투(?) 끝에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5유로 정도 추가금이 생겼다. 나의 착각인지 직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맛이 썼다. 작은 것 하나에 연연하고 싶지 않은데 아직 내게 5유로는 너무나 크다. 금액 자체보다도 또 무언가를 놓치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너무도 크게 다가온다. 나의 자괴감이 딱 5유로 지폐 사이즈만큼 작아졌으면 싶었다.
기분이 처질려할 때 직원의 경쾌함이 나를 끌어올렸다. 독일 사람들은 항상 무뚝뚝하다는데 여행하면서 보니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젊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장소의 특성 때문에 그런 걸까. 직원은 굉장히 쾌활했다.
파란 머리에 피어싱을 세네 개쯤 달고 있던 그는 방을 설명해 주며 끊임없이 'Nice'와 'Good'을 퍼부었다.
혼자 여행하는 거야? 좋아. 8박 맞니? 아주 좋아. 여기 근처에 펍이 좋아. 우리도 맥주를 파는데 아주 좋아. 자전거도 빌려주고 있어. 여기는 자전거 타기 아주 좋아. 오 네 티셔츠 마음에 든다!
쏟아지는 문장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때 너무나 이질적인 발음이 들려왔다. '나 그거 알아! 토토로! 맞지?' 내 티셔츠를 고갯짓 하며 묻는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너무 귀엽다. 너랑 잘 어울려.'
부풀었던 걱정이 티셔츠 속 토토로 그림만큼 작아졌다. 그래, 실수할 수도 있지. 다음부터 잘하면 되는 거야.
짐을 풀고 자리를 정리했다. 호스텔 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1층베드를 배정받았다. 6인실 치고는 방이 넓었지만 코너로 꺾인 구석에 침대가 놓여있던 터라 캐리어를 열고 닫기는 불편했다. 하루만 머물고 다시 방을 옮겨야 하기에 딱 필요한 것만 꺼내두었다.
이동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베를린에서의 일정은 동선이 꽤 중요한지라 그냥 동네 구경을 하기로 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올 때와는 달리 빈손으로 나온 거리는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다. 꽤 커다란 공원을 찬찬히 걸으면서 다시 한번 지도를 켰다. 오늘저녁은 피자로 결정됐다.
숙소 근처는 크게 볼만한 게 없었다. 더 정확히는 관심 가는 게 없었다. 외곽인지라 이제와 중심지의 건축물을 보러 가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했고 카페를 들어가기에는 조금 질렸다.(이때까지도 나는 커피 향이 지긋지긋했다.) 펍을 들어가자니 날이 너무 밝기도 했고 분위기가 겁이 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던 클럽은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볼 게 없으니 되려 보는 게 많았다. 한가한 공원과 거리를 가로지르는 신기한 배관들, 노란 벽돌과 갈색 담장사이로 난 작은 산책길. 피자를 사러 가는 길이 이토록 귀여운 건 반칙 아닌가? 매일매일 이런 풍경을 즐기며 산다면 그건 꽤나 안온한 삶일 것이다.
산책길 끝에 발견한 피자집은 생각보다 되게 작았다. 테이크아웃 전문점인 것은 알았는데 마치 놀이공원 스낵바 같은 동그란 건물이 길 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양옆으로 높이 서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앙증맞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맛있는 냄새가 맡아졌다. 메뉴판을 구경하는 사이에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피자가 포장되었다. 오븐에서 꺼내고 쓱쓱 조각을 나누고 박스를 바로 접어 냅킨하나를 끼어 건네준다. 홀린 듯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주인장이 눈을 마주쳐왔다.
"---?"
분명 독일어였는데 이해가 되었다. 같은 걸로 달라며 걸어 나간 손님의 등을 가리키자 주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 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본건 처음이었다. 쓱쓱 도우를 밀어 돌리고 재료를 올린다. 그제야 나는 내가 시킨 피자가 하와이안피자라는 것을 알았다. 구운 파인애플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오늘은 맛있을 거 같단 예감이 들었다.
오븐에서 피자가 구워지는 동안 두어 명의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확실히 관광객과 이방인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동양인을 보더라도 큰 반응이 없다. 하노버에서 느꼈던 기분 나쁜 시선이 없음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자를 받아 드니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맛있는 냄새가 얼른 나를 먹으라고 말하는듯했다. 나는 기꺼이 그 유혹에 넘어가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가게 앞 벤치에 앉아 갓 나온 피자를 먹으니 마냥 행복했다. 구운 과일의 단맛과 짭조름한 베이컨의 궁합이 환상적이었다. 오늘부터 나는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두어 조각 먹으니 배가 어느 정도 찼다. 박스를 들고 숙소로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과일 코너를 구경하다가 평소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달리 맛있어 보이는 자두를 한 팩 사들고 나왔다.
역시나 숙소에서 먹은 자두는 달고 새콤하고 너무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