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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Sep 26.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15

작은 선택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2016.09.21

Halle (Saale), Deutschland


 이르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에 짐을 정리해 나왔다. K덕에 하룻밤을 보냈으니 다음도시로 이동할 차례였다. 이번에도 돈을 내고 묵는 것이 아닌 지인찬스를 사용했다.


 나는 종종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대단하시다"라는 말을 들었다. 국적불문 던저지는 그 감탄 아닌 감탄의 의미를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여행을 할수록 그 말의 의미와 엄마아빠의 대단함이 크게 다가왔다.


 성인도 되지 않은 딸을 타국으로 선뜻 보낼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더군다나 혼자! 3개월이나! 내가 불안해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불안하고 걱정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들은 그 걱정을 내비치는 대신 괜찮을 거고 재밌을 거라고 말해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유럽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우리 집안은 유럽이랑은 연이 없다 생각했는데 건너 건너 찾아보니 한둘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유학도 아니고 그저 여행인데 친절하게 나라들을 설명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J오빠도 그때 알게 된 사람이었다. J는 엄마친구아들로 베를린 근처도시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내게 간단한 독일 매너와 시스템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유학을 준비하는 걸로 오해(?)해 학교 리뷰부터 해주었지만 여행으로 목적을 정정하고선 가벼운 정보들 위주로 알려주었다. 


 하노버에서 베를린의 숙소를 구하지 못했을 때 왜 숙소가 없는지 원래 이렇게 숙박비가 높은지 조언을 구하고자 다시 연락했었다. 내게 마라톤 행사 때문에 방이 없다 알려준 사람도 J였다.

 지갑사정으로 외곽으로 빠져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J에게서 "재워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룸메이트와 집을 셰어 하는데 내가 괜찮다면 거실로 사용하는 방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번에도 역시 "떙큐"였다.



 J의 집에 머무는 걸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거의 통보식으로 전달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집에 신세 지겠다는 딸의 얘기에 엄마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저때의 나는 무지했고 용감했다. 그리고 '엄마의 친구 아들 = 안전'이라는 허술한 공식을 세웠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곳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정상이었던 게 천운이다. 진짜 운이 좋았다. 혹시나 그럴리는 없겠지만 얄팍한 친분으로 타인의 집에 머무르는 걸 따라 하는 분은 안 계셨으면 좋겠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저때의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당신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J가 머무는 도시는 베를린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대학도시였다. 비싼 기차표 대신 저렴한 버스를 이용했다. 이 역시 J가 알려주었다. K의 기숙사를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이곳에도 우리나라의 고속버스터미널처럼 장거리 노선이 경유하는 정류장이 따로 있었다.


 정류장이라길래 막연히 열차가 다니는 중앙역 근처라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지하철은 물론 버스까지 타야 갈 수 있는 구석이 내가 가야 할 정류장이었다. '베를린이 크긴 크구나' 생각하며 열심히 캐리어를 끌었다.

 그리고 반대방향의 시내버스를 탔다. 하하.

변명을 하자면 날이 너무 좋았다 (무슨 상관이지?)


 버스를 타고 10분이 돼서야 다른 방향의 버스를 탔다는 걸 깨달았다. 부지런을 피운덕에 시간이 넉넉한 게 다행이었다. 버스를 내리고 다시 올바른 버스를 타고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렸다. 그러나 뭐가 꼬였는지 버스터미널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십여 분간의 해메임 끝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초행길이라고 잔뜩 겁을 먹고 일찍 나온 덕에 늦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무사히 터미널에 도착했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미리 도착해 서 있었다. 표를 보여주고 짐을 싣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생각보다 커다란 의자가 꽤 편했다. 덩치가 작은 것도 가끔은 좋다.

 유럽에서 처음 타본 장거리 버스는 신기했다. 시간만 따진다면 한국에서 이보다 더 긴 버스도 타봤는데 유럽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으니 모든 게 새롭다. 어깨를 가로지르며 내려오는 안전벨트도, 시트에 박혀있는 긁히기만 해도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차브랜드의 로고도 신기했다.(그렇다 독일은 버스도 벤츠다)


 2시간을 달려 베를린에서 할레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 여정 이후 나는 유럽의 버스를 애용했다. 가격은 절반도 안되는데 큰 불편함은 없다.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에게 이보다 사랑스러운 운송수단이 있을까.

 동생과 다시 유럽을 여행했을 때는 기차보다도 더 주요 이동수단으로 이용했을 만큼 나는 버스 여행이 만족스러웠다.


 J는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마중 나와주었다. 얼굴도 처음 보지만 카톡을 열심히 해서인지 어색함은 적었다. 트램을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J의 집에는 러시아출신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커다란 덩치와 달리 친절했다.

 짐을 풀고 오랜만에 한국어로 수다를 떠니 입도 풀렸다.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눈 J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남아있던 불안함이 밑으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거실이라고 말하지만 문을 잠글 수 있고 소파베드도 푹신했다. 작은 협탁을 책상 삼아 밀린 엽서를 정리했다. 어제 부치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한두 장 더 적어 내렸다.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K에게도 연락을 남겼다. 

지독한 악필을 읽느라 고생하셨을 수신자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새로운 곳으로 가고 새로운 사람들은 만나는 건 많은 심력을 소모한다. 즐겁지만 피곤하기도 하다. 사람관계에서 오는 후회는 곱씹을수록 배가되고 아쉬움은 진득이 발목을 부여잡는다. 언제쯤이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해질까?

 

 날이 좋은 날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다. 평화롭고 따스하다. 그러나 날이 흐려지면 분위기가 급변한다. 축축하고 습한 돌과 이끼냄새가 올라온다. 맑았던 낮이 지고 흐릿한 저녁이 찾아왔다. 이전의 일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생각이 겹치면서 머리가 복잡했다.


 여기서 베를린으로 가고 나면 어디로 가야지? 스페인을 가야 하는데 비행기표는 언제 사야지? 어디에서 가야지? 모든 여행을 마치면? 난 한국에서 뭘 하고 살아야지? 하고서 후회하는 게 나을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게 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오는 물음에 숨이 턱턱 막혔다. 불현듯 쏟아지는 수많은 생각들이 후회와 두려움을 만나 속을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가볍고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항상 무겁고 질척이며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창밖을 보며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냥 쉰다고 생각하자. 나는 새로운 걸 경험하고 쉬러 왔다 너무 무리하지도, 너무 두려워하지도 말자. 그것이 여행이고 삶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 연락이 이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허락을 구할 수 없기에 대부분의 인물들은 가명으로 표기합니다.

 앞으로 나오는 여행 하며 만난 동행과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은 생략되거나 많이 축약되어 나올 예정입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이어보겠지만 제 스킬부족으로 이야기가 끊어지거나 급격한 감정변화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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