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ground
2016.09.28
Berlin, Deutschland
어제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깠다.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고생한 발을 식히며 입으로도 시원한 맥주를 들이부었다. 처음 마셔본 브랜드의 맥주는 오직 베를린에서만 유통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우며 룸메이트들과 통성명을 했다. 새로 들어온 C까지 총 3명의 남자들은 각자의 이유로 바쁜 터라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다. 그들의 향수와 데오드란트를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대에 나와 1일 교통권을 구매했다. 오랜만에 뽑은 표는 저렴하진 않았지만 목적지를 위해 1시간씩 걷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있었다.
어제는 과거의 유적들을 보았다면 오늘은 미래를 위한 기반을 볼 시간이었다. 목적지는 <독일기술박물관>이었다. 20여분을 지하철을 타고 달려 박물관에 도착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 표를 보여주고 팜플랫을 챙겼다. 박물관은 '기술'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답게 다양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인상 깊은 것은 교통수단에 관한 것들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철도와 항공에 관한 것은 발전의 역사는 물론 그때의 사용되던 모형까지 알차게 전시해 두었다.
지도를 챙겨 들고 관람을 시작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관람객들이 많지 않았다. 대신에 단체로 보이는 학생들이 종종 보였다. 꼬마 병아리부터 조금 큰 중닭까지 다양한 연령대였다.
박물관은 '기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답게 다양한 과학기술을 체험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시작되는 게임과 손으로 움직이는 퍼즐도 있었다. 관람객들은 어린아이와 성인 구분 없이 한 번쯤은 버튼을 누르고 퍼즐을 만져봤다.
어릴 적 종종 과학관을 놀러 가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게 무슨 원리인지도 잘 모르면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상이 신기해 한참을 머물며 놀았다. 사실 지금도 그것들이 어떠한 원리를 가졌는지 잘 모르겠다. 이과공부는 손에서 놓은 지 오래라 설명을 해줄 때는 고개를 끄덕여도 뒤돌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즐거웠다. 재밌었다. 나는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을 과학이다 불렀다.
안 그래도 어려운 영어인데 생소한 용어까지 나오니 어지러움이 두 배였다. 그럼에도 쉬운 단어로 풀어써둔 덕인지 구글 번역의 힘을 빌리면 떠듬떠듬 읽을 정도는 되었다.
구체적인 원리를 몰라도 눈앞에 보이는 걸 체험해 볼 수는 있다. 열심히 빛을 거울에 반사시키며 놀고 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모형을 만져보았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을 빼앗는 것일까 싶어 눈치를 보았지만 단체관람객이 지나간 후에는 주변에 어린애는커녕 사람도 거의 없어서 마음 놓고 놀았다.
그렇게 놀다 보니 간단한 물리학과 자동차 코너를 지나 IT구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아까와는 달리 다양한 모니터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역시나 여기저기 쏘아다니며 놀다가 '감정측정기'라는 모니터를 발견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지금의 감정상태를 게이지로 표시해 주는 신기한 친구였다. 당당히 얼굴을 들이밀으니 예상치 못한 결과가 튀어나왔다.
분노, 기쁨. 연령 9세. 음?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멀어졌다 다가가니 비슷한 결과가 뜬다. +-5라는 소심하게 더한 예측과 함께 Age 옆에 '9'라는 숫자가 떴다.
역시 인공지능은 믿을게 못된다. 졸지에 나이의 절반을 잃어버린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서양 것들은 동양인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한다더니 서양 것들이 만든 프로그램도 동양인의 나이를 제대로 못 알아본다.
살면서 동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당연하다. 십 대에게 동안이란 말은 안 한다.) 학교를 나와서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될 시간대에 돌아다니다 보니 다들 내 나이를 두어 살쯤 높게 봤던 터라 굉장히 색다른 기분이었다.
작은 컬처쇼크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이것저것 기웃대며 놀았더니 배가 고파왔다. 중간에 있는 매점(?) 비스무리한곳에서 프레첼을 사 먹었다. 짭조름한 밀가루를 입에 밀어 넣으니 앞으로 3시간은 더 돌아다닐 수 있을 듯했다.
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열차들이 가득한 전시관이었다. 실제 사용되었던 열차들이 운송기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그곳에 모여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고풍스럽고 오래된 기차들부터 오늘 타고 온 U반과 비슷한 전철까지 다양한 기종의 차량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중 몇몇은 내부 객실까지 볼 수 있었는데 등급과 시대별로 달라지는 장식과 편의성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다.
시대별로 전시된 차체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초기 증기기관 모델부터 구경했다. 네모난 여행가방을 차곡차곡 쌓아둔 걸 보니 기차여행에 대한 낭만이 퐁퐁 솟아올랐다. 증기가 나오는 칸 뒤로 붙는 석탄을 가득 채웠을 연료칸을 구경하고 빨간 벨벳의자가 놓인 금빛으로 가득 찬 화려한 여객칸을 지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독일과 기차를 동시에 떠올렸을 때 따라 나오는 기차가 나타났다.
당연한 일인데 신기했다. 진짜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는 거구나 싶었다.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을 읊어가며 그것이 그들의 과오라 하더라도 그냥 흐르게 놔둔다. 굳이 그 사건을 알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 문화 곳곳에 연결된 부분에서 나타나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쌓이고 쌓이면서 '당연한 역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관련된 사건이 관련된 장소에서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 아주 당연한 것인데 그게 그리도 신기했다.
어여쁜 기차들을 실컷보고 영어로 뱅글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땅 위가 아닌 바다와 하늘 위를 다니는 이동수단들이 가득했다.
길쭉한 카약부터 거대한 범선의 미니어처까지 다양한 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씩 다 둘러보다가는 숙소에 못 들어갈 듯해 큼직큼직한 것들만 구경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며 옆을 내려보자 각양각색의 목조배들이 놓여있었다. 옆 전시실에는 거대한 범선들이 작게 축소되어 방안을 가득 매웠다.
바이킹이 탈것 같은 나무배부터 타이타닉 같은 커다란 여객선까지 사람 얼굴만 한 크기로 축소되니 꽤 귀엽기도 하고 멋지기도 해서 왜 사람들이 배 모형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배가 전시된 곳 옆으로는 비행기들이 '걸려있었다'. 초기 열기구와 배 위에 거대한 풍선을 단것 같은 비행선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지긋지긋해한 전투기까지 다양한 비행기들이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한때나마 전쟁에 미쳤던 나라답게 전투기의 종류가 어마무시했다. 투박한 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지만 이 전투기 한 대에 과연 몇 명의 사람이 죽었을지를 생각하면 오싹하기도 했다.
하나하나 본다면 더 재밌었겠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관람시간에 후딱 한 바퀴만 돌고 나왔다. 그럼에도 전투기에서 보이는 낯설지 않은 마크와 숫자들이 눈에 콕콕 박혀왔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진화된 기계들은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하게 변해왔다. 나는 비폭력주의자에 전쟁을 끔찍하게 여기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기계들이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는 어린애다.
저 비행기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날았다는 진실이 끔찍하지만 동시에 나무에서 철로 진화한 몸체가, 고작 15분을 날던 기체가 1시간 이상 비행을 하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멋져 보인다. 이 모순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아졌다.
5시간 만에 박물관을 벗어났다. 중간중간 시간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나 오래 머물러있을 줄은 몰랐기에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 박물관이었다. <유대인 박물관>이라는 명확한 이름처럼 독일 내의 유대민족에 대한 박물관이었다. 나치 관련 이야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대민족의 처음부터 설명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꽉꽉 찬 역사들을 머리에 욱여넣으려니 약간 버겁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유대민족'의 역사를 훑은 소감은 '신기하다'였다. 정말 신기한 민족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이에서도 종파가 갈리고 인종이 갈리는 게 의외였다. 물론 주요 계파는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인'의 외관이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쪽까지 뻗어있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역겹고 징그럽다. 범죄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지만 그게 민족 말살 전쟁범죄에서 또 이루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종교다 자유다 외치지만 결국 전쟁의 논리는 땅따먹기다. 귀족대신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죽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제일 약한 자들부터 시작된다.
내용만큼이나 복잡한 건물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일반적인 박물관이나 갤러리와 달리 확연히 복잡한 구조에 조금 애를 먹었다. 경비원에게 조심스레 길을 물으니 부담스러울 만큼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얼마 보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고파오는 배에 박물관을 나서 근처 식당을 검색했다.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없거니와 어제 먹은 소시지와 감자튀김이 아른거려서 식당보다는 노점을 검색했다.
근처 테이크아웃전문점에서 어제와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받았다. 마감 20분 전이라 그런지 감자튀김은 딱딱했다. 그래도 소시지는 어제 먹었던 집보다 더 맛있어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해가 지고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얼떨결에 2층버스에 앉게 되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예뻤다. 어디든 앉아서 구경하는 야경은 보기 좋은 법이다. 안전한(?) 버스 안에서 구경하니 걱정 없이 편하게 눈이 호강했다. 다만 그 빛에 홀렸는지 정류장을 잘못 내려서 한정거장을 더 걸어야 했다.
버스에 앉아서 볼 때는 예쁘기만 했는데 두 발로 길을 걸으니 예쁨과 동시에 겁이 났다. 그럼에도 선선한 공기가 꽤 마음에 들어서 부러 서두르지는 않았다.
내일은 파스타를 먹을까. 미술관을 가야지. 자연사박물관도 갈 거야. 예쁜 광물들도 구경해야지.
아, 하루하루 내일을 기대하는 삶은 꽤나 즐겁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