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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2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갈 하긴 했어

by 강단화 Mar 17. 2025

2016.10.23

Sevilla, Spain


 동행도 일정도 없는 날이기에 느긋하게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요 며칠 계속 움직였더니 나의 비루한 몸이 휴식을 요하기도 했다.

 잘만큼 늦잠을 자고 짐을 챙기는 E 언니 옆에서 나도 다음 여행지의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도시를 위해 길을 나서는 언니를 따라나와 함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비가 와서 아쉽긴 했지만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언니와는 멀지 않아 (아마도) 또 만나겠지만 그래도 이별은 이별이었다. 


 떠나는 언니를 배웅하고 나는 엊그제 언니와 함께 갔던 식당에 다시 찾아갔다. 저녁 늦게 들어간 저번과는 달리 점심 장사를 막 시작하는 식당은 대부분의 손님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어로 '기다려요'와 '어서 오세요'를 연발하는 웨이터를 지나 바 Bar석에 안내를 받았다. 메뉴판을 더 읽을 것도 없이 리조또와 띤또 데 베라노를 주문했다. 오로지 이 두 개를 위해 이 식당을 다시 찾았다.


 주문을 기다리는 와중에 옆자리 손님이 떨어트린 카드키가 보였다. 하얀색 카드키를 본 순간 톡톡, 옆자리 손님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짓으로 키를 가리키니 작게 '감사합니다'소리가 들려왔다. 마주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저번에 내가 묵었던 호스텔은 키를 잃어버리면 보증금이 7유로였다. 그 돈이면 리조또와 와인을 한번 더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짧지는 않은 기다림 끝에 내 리조또와 와인을 받을 수 있었다. 약간은 형태가 느껴지면서도 이빨로 씹으면 금방 형체가 뭉그러지는 리조또는 원래도 죽을 좋아하던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크림과 밥알을 같이 씹고 있자니 역시 귀찮아도 다시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따뜻해졌을 때 시원한 와인까지 들이부으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리조또도 맛나지만 이곳에서 마신 띤또 데 베라노가 딱 내 입맛에 맞았다. 술을 아낀 탓인지 레몬주스를 많이 넣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와인과 섞인 상큼한 레몬향과 그 둘을 중화시켜 주는 달달한 맛은 몇 잔이고 비울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직 1시도 되지 않은 낮이란 걸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딱 두 잔만 마셨다.


너무나 맛있었던 리조또. 양이 많지는 않았다.너무나 맛있었던 리조또. 양이 많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했다. 다음 목적지는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이다. 버스를 타고 나라를 바꾸는 건 처음이라 약간 긴장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티켓메일을 캡처해서 보여줬는데 국제선(!)은 인쇄한 종이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괜찮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귀찮아도 마음 편한 게 났다 싶어 티켓을 인쇄했다.


 안 통하는 손짓발짓으로 스페인 문구점을 가야 하는 걸까 싶었지만 다행히 호스텔 립셉션에서 가능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물어보는 태도와 문제를 땜빵할 돈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한낮의 더위는 에어컨이 잘 막아주었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요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어제 잠에 들며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나는 언니를 배웅했고, 혼자 식당에 갔으며, 호스텔 직원과 안 되는 영어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이것들도 도전이라 부른다면 도전이지 않을까? 




2016.10.24

Sevilla, Spain

Lisboa, Portugal


 어제의 게으름이 오늘로 넘어왔다. 오늘의 절반을 버스에서 보내야 하는 터라 시간도 없는데 그렇다고 부러 무언갈 하기에는 나의 귀찮음이 발목을 잡았다. 이렇게 침대를 좋아하고 게으름을 사랑하는데 무슨 배짱으로 80일이 넘는 외박을 결정한 건지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을 뒤로하고 짐을 챙겼다. 베를린에서 수건을 놓고 온 뒤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체크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저번 야간버스처럼 추울 수도 있으니 외투는 따로 빼놓고 꼼꼼하게 캐리어를 확인했다. 야금야금 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 짐을 호스텔에 잘 맡겨두고 마지막으로 세비야를 누볐다.


 약 2시간 반정도의 여유시간은 우연찮게 새로운 동행과 함께했다. 숙소에서 만난 그분은 유럽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보다 언니였다. 호쾌한 모습으로 이제 첫날이라며 스페인 광장을 구경하러 간다 했고 나 역시 한번 더 갈 계획이었기에 즉석 동행이 이루어졌다.


 한번 와봤다고 길을 찾는 것도 포토 스폿을 찾는 것도 쉬웠다. 더군다나 별 정보 없이 왔다며 내가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 언니 덕에 가이드 노릇을 하게 되었다. 가이드북에서 읽은 이야기와 주워들은 이야기를 주절거리다 보니 순간 내가 너무 말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댄 것'같아서 뻘쭘해 질려하자 언니가 오히려 가이드 고맙다며 나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원래도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크게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일종의 '고슴도치'식 칭찬이거나 체면치례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며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듯 던진 칭찬에 '진짜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는 칭찬은 다른 칭찬보다 배로 기분이 좋았다.


 문득 한국으로 돌아가 가이드로 일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소개하는 것도, 한국사람에게 소개하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꽤 즐거운 상상이었다.


 짧은 동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찾고 어제 E 언니가 떠났던 길을 따라 걸었다. 읽을 수 없는 스페인어 사이에서 'Lisboa'를 찾아갔다. 짐을 버스에 올리고 어제 인쇄해 둔 티켓을 보여주고 자리에 앉았다. 또다시 시작되는 장거리 버스였지만 이번에는 야간대신 오후를 통으로 보내는 노선이었다.


 두 번째 버스는 꽤 괜찮았다.  오히려 야간버스보다 더 푹신해서 좋았다. 나름 나쁘지 않은 첫인상이었건만 내려야 하는 사람을 태운 채로 출발해 버린 바람에 출발한 지 15분 만에 도로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어이가 없는 실수이지만 스페인이니 그러려니 했다. 처음탄 야간버스도 출도착 시간을 제대로 맞춘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번도 그렇겠구나 싶었다.

 다시 제대로 출발한 버스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정차했다. 티켓을 뽑아오지 않은 승객들은 이때 내려 사무실로 가 티켓을 출력해야 했다. 어리둥절하게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미리 뽑아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50센트로 얻은 마음의 안식과 몸의 편안함이다.


 내렸던 승객들이 땀에 쩔은채로 종이를 팔락이며 돌아오자 차가 출발했다. 늦으면 놓고 간다는 기사님의 엄포가 잘 먹혔는지 다들 빠릿빠릿하게 다녀온 듯했다.

 2시간쯤 창밖을 구경하기도 하고 차창에 기대어 졸기도 했다. 기다란 아스팔트옆으로 조금은 삭막하다 싶은 풀숲이 보였고 곧이어 핸드폰 로밍 알람이 울렸다. 포르투갈이었다.


 육로로 국경을 건넌 순간의 소감은 단순했다. '진짜?' 딱 그 마음이었다. 대충 표지판하나 서있고 길을 지키는 사람도 검문소도 없었다. 내가 국경을 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스페인 통신사에서 날아온 로밍문자뿐이었다.

 참으로 쿨하다. 땅에 선 그어놓고 니땅내땅 외치는 게 인간사라지만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경계도 절로 느슨해지나 보다. 유럽의 국경은 대부분이 육로로 건널 수 있다 보니 이런 경우가 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는 건 색달랐다. 한국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으려면 최소 익사 최대 총살을 각오해야 한다는 게 스쳐 지나갔다. 타국의 길 한복판에서 고국이 분단국가라는 것을 실감했다.


 바로 옆국가이지만 시차가 존재했기에 손목시계를 다시 돌렸다. 한 시간을 뒤로 돌리니 괜히 한 시간을 더 번듯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간간히 멈추며 달렸고 나는 불안한 와이파이와 열리지 않는 화장실문에 그냥 잠을 자기로 선택했다. 눈을 뜬 건 어딘지도 모르는 휴게소 앞이었다.

 

 역시나 당한 강제하차는 다행히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다. 먹통이 되어버린 핸드폰과 할 것 없는 지루함을 버티다가 눈앞의 상술에 낚여버렸다. 귀여운 애니메이션이 그려져 있는 뽑기 기계를 돌린 것이다. 1유로로 얻은 동그란 캡슐은 딱 캡슐 크기만큼의 탱탱볼이 들어있었다. 애초에 스페인어로 적혀있었던 터라 뭐가 들어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캡슐을 꽉 채운 탱탱볼이 당황스러웠다.

 포스터를 보고 대충 캐릭터 스티커겠거니 생각했는데 뒤에 배경효과라고 생각한 동그라미가 탱탱볼을 뜻하는 거였다. 자다 일어나 느낀 지루함에 내 판단력이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해 발생한 착오였다.


 그래도 1유로 짜리니 짧은 도파민 충전으로 괜찮았다 생각하며 도로 버스에 올라탔다. 문제는 캡슐이 열리지 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분명 눈으로 확인이 되고 붙어있는 스티커도 없는데 캡슐이 열리지 않았다. 온갖 힘을 쓰며 돌려보아도 꿈쩍도 안 하는 것이 설마 탱탱볼이 아니라 그냥 이 플라스틱 자체가 뽑기인 건가?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별것도 아닌 장난감 캡슐을 열어보겠다고 30분 이상을 자리에 앉아 끙끙거렸다. 보다 못한 건너편 자리의 아저씨가 나에게 손짓을 하더니 캡슐을 받아갔다. 그리고 못 열었다.


 아저씨는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돌리더니 두어 번 헛손질을 하고서야 캡슐을 살펴보았다. 그러고서도 한참을 캡슐과 씨름했다. 나에게 다시 닫은 거냐 물어보아서 나는 한 번도 열지 못했다 답해주었고 안에 들어간 게 무엇이냐 묻기에 그냥 장난감공이라고 말했다. 왜 그것을 돈 주고 샀는지 이해를 못 하는 얼굴이었지만 아저씨는 열심히 캡슐을 돌려보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아저씨는 이제 오기가 생겼는지 캡슐을 눌러 터트리기 시작했고 결국 포기하셨다. 캡슐이 불량이라고 말하는 빠른 목소리가 조금 웃겼다. 영국출신인지 아저씨가 내뱉는 영어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과 속도가 아니었지만 굉장히 불평을 하고 있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약간 눈치까지 보게 되는 불평에 나는 도로 캡슐을 가져왔고 아저씨가 진정되었을 때쯤 다시 누르며 돌려보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캡슐은 내게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탱탱볼을 고화질로 보여주었다. 그 순간 약간은 허망해 보이는 아저씨가 내뱉은 'Oh' 소리는 꽤 오래 기억에 남을듯했다.


 그 작은 소란이 지나고도 한 시간을 달려 버스는 리스본으로 들어섰다. 시간표와 달라져버린 도착시간과 계속해서 반복되는 리스본이란 역 이름에 옆자리 영국 아저씨를 포함한 몇몇 승객들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혹시나 잘못 내릴까 봐 구글맵을 확인함과 동시에 미리 인쇄해 둔 역 이름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도착지를 체크했다. 옆자리 영국아저씨의 도착지는 덤이었다.


 버스는 길고 긴 여정 끝에 첫 번째 리스본의 이름이 붙은 역을 지나고 20분을 더 달려 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 타있기만했는데 왜 이리 지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늦은 시간에 오늘은 뭘 더 하기보단 그냥 씻고 자는 게 좋을듯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배정받은 침대에 올라 기지개를 켰다. 내내 앉아있던 허리를 뉘어주니 좀 살 것 같았다.


버스에서 본 리스본. 이걸로 야경을 봤다 해도 될까버스에서 본 리스본. 이걸로 야경을 봤다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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