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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3

우연이 인연이 되고

by 강단화 Mar 24. 2025

2016.10.25

Lisboa, Portugal


 어제 배정받은 2층 침대에서 눈을 떴다. 마주 보며 위치한 문이 민망스러웠지만 다행히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닫혀있었다. 침대의 위치가 딱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높이라 자다 일어나서 보면 꽤나 뻘쭘할 것 같았다.

 조식을 챙겨 먹기 전에 룸메이트인 P와 수다를 떨었다. 중국출신 P언니는 영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홀리데이를 맞아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어제 말을 트고 같이 저녁도 먹으면서 오늘 같이 시내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썩 좋지 않은 내 영어실력에 비해 P언니의 말은 조금 빠르고 억양이 특이했다. 영국과 중국의 악센트가 섞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식 영어가 친숙한 내 귀에는 조금 어색하게 들렸다. 그래도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국식 영어를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본인말로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던 P와의 대화는 유쾌했다. 한국문화를 꽤 잘 알고 있어서 대화를 하는데 주제가 끊이지 않았고 영어가 서로의 모국어가 아님에서 오는 묘한 동질감도 즐거웠다. 같은 중국출신 유학생이었지만 하노버에서 만난 K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통신사 유심을 구입했다. 스페인에서 쓰던 유심을 바꾸자 비로써 데이터가 터지고 시그널이 돌아왔다. 나이스. 21세기의 여행에서 데이터 터지는 핸드폰은 신이요, 길잡이요, 나의 분신이다.


 든든한 데이터를 가지고 P와 함께 시내구경을 나섰다. 리스본은 여러 구역이 각기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구시가지의 중심인 '바이샤 지구'였다. 리스본을 검색하면 한 번씩은 꼭 보는 노란 트램이 다니는 언덕풍경이 아니라 평지로 이루어진 상업구역이었다. 강변옆으로 조성된 광장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바글거렸다. 나도 그 틈바구니에 껴 추억사진을 한 장 남겼다.


 동행이 생긴다는 것은 혼자 여행하는 나의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기회였지만 나는 P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딱 4장을 찍은 뒤였다. 나는 나보다 사진을 못 찍는 사람을 처음 봤다. P는 쾌활하고 유쾌하고 좋은 동행인이었지만 좋은 사진사는 아니었다. 나 역시 그랬기에 우리 둘은 자연스레 사진을 뒤로하고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보다 무생물이 더 잘 찍힌다역시 사람보다 무생물이 더 잘 찍힌다


 P와 광장을 구경하고 시가지를 돌아다녔다. 틈틈이 미리 와있던 E언니와의 카톡도 이어졌다.

 시가지 구경이라 해봤자 상업지구인 '바이샤'였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쇼핑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 그저 P의 뒤를 졸졸 따르는 게 다였지만 혼자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편집샵을 들어가는 건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작은 가게에서 나라면 쳐다도 안 봤을 스카프를 멋지게 둘러본 P는 거울을 두어 번 확인하더니 쿨하게 물건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왔다. '땡큐!'를 외치는 목소리는 경쾌했다. 슬쩍 쳐다본 가격표에 공이 2개가 붙어있었다. 나라면 10만 원이 넘는 스카프는 아무리 예뻐도 안건들것 같은데 P는 거침없이 물건을 만지고 착용하고 내려놓는다. 이것이 대륙의 기개인 건가?


 가게구경이 어느 정도 끝나고 우리는 성당과 그 근처에서 열린다는 벼룩시장을 보러 움직였다. 특이하게도 시장의 이름이 '여자도둑 시장(Feira da Ladra)'이었다. 이상한 이름에 자연스레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대중교통을 타는 것도 좋았지만 설렁설렁 구경하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걸어가기로 했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거대한 유람선이 보였다.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도 크루즈들이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가갈수록 더더욱 커지는 배가 신기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봤던 것보단 조금 작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작은 배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치 아파트 한 단지가 통째로 바다에 떠있는 모습이었다.


 길을 걸을수록 외곽으로 빠지는 건지 아니면 공사 중인 것인지 도로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 길은 빈말로도 정비가 잘 되어있다 말하기 힘들었고 그전에 내린 비 덕에 길 주변으로 약간의 진창까지 생겨있었다.

 웅덩이를 피하며 걷다가 크루즈 옆을 지나갈 때 길가에 서있는 사람을 보았다. 캐리어의 바퀴가 빠진 것인지 대략 10대 후반이나 20대 초 같은 남자가 얼굴이 벌게진 채 캐리어를 끙끙 끌고 있었다. 나도 독일을 떠날 때부터 캐리어 바퀴가 말썽이었기 때문에 절로 시선이 갔다.


 슬쩍 보니 내가 가진 캐리어와 달리 손잡이가 노출형에 바퀴도 나사가 아니라 부품 결합으로 손잡이와 이루어진 가방 같았다. 대충 고칠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자 망설일 게 없었다. 다가가서 가방을 봐도 되냐 하니 남자의 얼굴이 물음표로 채워졌다. 가지고 있던 물티슈로 대강 진흙을 털고 바퀴를 자리에 밀어 넣었다. 탁탁. 두어 번 눌러주니 제자리로 들어간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환해진 얼굴의 남자가 나보고 메카닉이냐고 물어봤다. '겨우 이걸로?' 싶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뻐 그냥 고개를 저었다. 임시니까 새로운 걸 사라는 말을 하고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캐리어를 고치는(?) 동안 P는 나를 굉장히 요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웬 오지랖이지?' 싶은 얼굴이었다. 남자와 멀어지고 들린 P의 왜 도와주었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랬다'라고 답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데 굳이 안 할 이유가 있을까. 서로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은 해프닝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뒤에 도착한 벼룩시장은 꽤 작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비가 왔던지라 약간은 어수선하게 시작되는 장터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올랐던 수많은 언덕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리스본에서 평지만 걷겠다는 건 하루 종일 앉아만 있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고물이라고 부를만한 오래된 물건들과 이건 옷이 아니라 넝마 아닐까 싶은 카디건, 빛바랬지만 여전히 알록달록한 색색의 장난감과 사이즈도 질감도 천차만별인 신발들까지. 정말 누군가 쓰던걸 고대로 훔쳐오기라도 했는지 모든 물건에서 손때가 느껴졌다.


천막도 없는 좌판도 꽤 많았다.천막도 없는 좌판도 꽤 많았다.


 작고 소란스러운 시장은 내게는 꽤 재밌었지만 P의 타입은 아닌듯했다. 물론 즐거워했지만 물건을 하나씩 보게 되는 나와 달리 P는 전체적인 풍경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좋았지만 길게 볼 장소는 아니라 여긴 것이다. 아쉽지만 P를 따라 성당을 구경하러 발을 옮겼다.


 성당을 보고 열심히 올랐던 언덕길을 도로 내려가다가 우연히 E언니를 마주쳤다. 동시에 내뱉어진 '어?'소리가 얼빵했다. 물론 서로가 리스본에 있다는 것도, 오늘 하루는 시내를 구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길에서 만날 줄은 전혀 몰랐다. 숙소도 다른 지구에 잡은 턱에 나중에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P에게 여행을 같이 다녔던 언니라 말했다. 우연히 여기서 마주친 거라 말하니 P 역시도 신기해했다.


 자연스레 일행이 셋이 되었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흔쾌히 서로를 동행으로 맞이한 언니들과 함께 리스본을 돌아다녔다. 언덕길을 기다시피 오르며 짧은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식당에서 점심인지 브런치인지 모를 무언가도 먹고 리스본 전경을 보러 성을 올랐다. 노을이 예쁜 곳이라지만 날씨가 영 좋지 않았던지라 부러 노을보다는 전경에 집중하기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성을 올랐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고성을 헉헉거리며 오르자 눈 아래로 붉은 지붕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여기까지 기어 오느라 소모된 체력이 아깝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펄럭이는 포르투갈의 국기와 그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기대하지 않은 도시에서 본 기대하지 않은 풍경이라 그런지 더 멋있었다.


내려오는 길까지도 귀여웠다.내려오는 길까지도 귀여웠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집들부터 조금 젠체한 듯 서있는 큰 건물들까지 모든 게 조화로웠다. 마치 어지러운 퍼즐들이 알맞은 자리에 딱 들어가 있는 듯한 만족감을 주는 풍경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도시의 전경을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듯 비슷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라와 동네별로 분위기가 변하지만 마치 장난감이나 퍼즐 따위를 조립해 놓은 듯한 느낌은 어딜 가도 사라지지가 않는다.

 

 운동을 했으니 배를 채워야 한다며 우리는 성을 내려와 찾아놓은 식당으로 향했다. 숙소 안내판과 구글맵에서 찾아낸 식당은 오로지 비주얼만 기대해 들어간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맛이 없어도 너어무 없어 조금 고역일 정도였다. 어색하게 셋이서 나눈 눈빛에는 '맛없어'라는 단어가 선명히 띄워져 있었다.


 음식이 아무리 별로여도 먹다 보니 배는 채워졌고 수다를 떨다 보니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P를 먼저 보내고 언니와 조금 더 광장에서 수다를 떨었다. 어딘가를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던 탓에 졸지에 몸 좋은 경찰아저씨들을 구경하게 되었다.

 아예 클럽지구의 술집을 가도 되었지만 내일 언니와 근교도시를 가야 했기에 우리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밤이 깔린 광장에서 든든한 경찰아저씨들을 토템 삼아 수다를 떨었다. 더 놀고 싶은 마음과 리스본의 언덕들에게 발린 몸을 쉬어주고 싶은 생각이 충돌한 결과였다.

 결국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일 연락이 없으면 나를 버려라-' 따위의 말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숙소에서 향해 들어갔다. 휴족시간이 필요한 하루였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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