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보단 마지막이 좋아서
2016.10.26
Sintra, Portugal
아침부터 부지런히 눈을 뜬다고 떴는데 8시 반이 넘어있다. 언니에게 나를 버리고 먼저 가라 연락을 하니 언니도 이제야 일어났다는 답이 돌아왔다. 키읔자를 연발하고 정신을 차렸다. 조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며 언니와 계속 연락을 했다. 둘 다 계획을 세우기는 하는데 그것이 충동적이고 변동성이 많은지라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하다.
근교로 빠지는 열차 배차가 길었던 지라 차라리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아예 이르게 가는 건 포기했으니 밥이라도 먹자 싶어 조식을 받으러 내려왔다. 요청하면 즉석으로 만들어주는 조식은 맛있었지만 20분이나 걸리는 시간은 별로였다. 이미 주문한지라 그냥 가버릴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며 폰을 붙잡고 있었다. 마음을 편히 먹자고 다짐을 한 지 30분도 안된 참이었다.
기다림 끝에 조식을 받아먹고 부랴부랴 역사로 향했다. 줄을 서는 동안 종일권과 왕복권 중 어떠한 표를 살지 고민했다. 늦은 출발이라 하나만 보기도 빠듯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왕복권으로 구매했다.
트레인을 타고 40분을 달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 또 30분을 넘게 달렸다. 드디어 도착했나 싶었지만 우리에겐 입장권이라는 길고 긴 줄이 남아있었다. 무계획 여행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다행히 날은 적당히 따뜻하고 바람이 부는 날씨덕에 엄청 덥지도 않았다.
오늘의 방문지는 리스본 근교에 있는 신트라(Sintra)라는 지역이었다. 지역 곳곳 위치한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네였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옛 포르투갈왕가의 여름 별장인 페나성(Palacio da Pena)을 보러 왔다.
1시간이 넘는 대기 끝에 들어간 페나성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줄을 설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었다. 사진을 한 장 찍으려 해도 무조건 걸리는 타인의 얼굴에 결국 포토존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메인을 벗어나 구석으로 빠져 사진을 찍자 얼추 괜찮은 뷰가 나오기 시작했다. 성 자체가 워낙 색상이 다채로워 어디서 찍어도 색감이 예뻤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페나성의 양식은 복합적이었다. 마치 장난감처럼 네모네모하게 쌓인 성 옆으로 둥근 돔이 보였다.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산 파우 병원'을 더 단순하고 투박하게 만든 것 같았다. 색채는 화려했지만 성 자체의 시간의 흐름은 숨기지 못했고 군데군데 보이는 보수가 필요한 지점은 이 성이 시멘트로 만든 테마파크가 아니란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귀엽고 장난감 같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유롭게 둘러보기에는 사람으로 가득 차 엄두도 나지 않았고 다들 사진을 찍느라 바쁜지라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기도 힘들었다. 실내를 더 꼼꼼히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우리는 사진을 좀 건지고 나서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건물이 예쁘고 찬찬히 본다면 더 볼 게 많았겠지만 몰려오는 관광객들에게 질려버린 우리는 그냥 성을 빠져나오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기다림 끝에 들어간 것 치고는 짧은 관람이었다.
부러 근교로 나왔는데 바로 다시 들어가려 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까지 온 김에 더 갈만한 곳이 없을까 싶어 고민하다 근처에 있는 호카곶(Cabo da Roca)으로 향했다. 유럽대륙의 최서단이자 '땅의 끝'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버스를 40분이 넘도록 타고 달려간 '땅의 끝'은 꽤 실망스러웠다. 절벽 끝에 펼쳐진 바다는 장관이긴 했지만 나에게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날씨가 흐려 가시거리가 짧은 탓에 감동도 적었다. 볼 것이라곤 유럽의 끝이라고 적어놓은 비석이 다였다. 마치 제주도의 섭지코지 같았다. 흐린 날의 섭지코지와 흐린 날의 호카곶은 마치 쌍둥이 같았고 불어 치는 바람 역시도 형제인 듯 거셌다.
잠깐의 감상과 우다다 연사를 누른 사진 촬영 끝에 언니와 나는 달달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바람에 휘청이며 버스 정류소로 돌아왔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던 루트는 아니었지만 급하게 마음먹은 것 치고는 괜찮았던 당일치기였다. 또다시 버스를 타고 신트라 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다시 40분을 넘게 달려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와중에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종일권을 끊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짧은 생각덕에 교통비만 더 들었다. 내 여행의 고질병이다.
언니와 나는 리스본 역에 내리자마자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인기가 좋은 만큼 예약이 밀려있었기에 우리는 2시간 뒤로 예약을 걸어놓고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조금 두꺼웠던 옷을 더 가볍게 갈아입고 다시 만난 우리는 예약시간이 될 때까지 시내를 구경했다.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수첩과 볼펜을 하나 샀다. 당장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 수첩에 여행 계획을 적어야지, 생각했다. 그럼 이 수첩을 채워나갈 때마다 리스본이 생각날 것이다. 새로운 여행을 짜며 옛 여행을 떠올릴 것이다. 그 순간이 기대되었다.
시내를 두어 바퀴 돌다 보니 어느새 예약시간이 되었다. 식당 앞으로 찾아가니 세팅된 빈자리가 뻔히 보이는데도 우리 보고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이게 뭐지?' 싶을 때 자리에 안내를 받았다. 우리의 얼굴이 떨떠름해 보였는지 매니저가 예약장부를 가져와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아마 우리 전타임 사람들이 노쇼를 한 모양이었다. 대충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메뉴판을 보았다. 추천받은 문어요리와 하몽을 주문하고 나는 로제와인을, 언니는 화이트와인 한잔을 주문했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에게 로제와인은 이름만으로도 대충 어떤 맛인지 알 수 있는 귀한 친구였다. 수많은 어지러운 이름 중에서 로제를 고른다면 완벽한 맛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아는 맛'을 즐길 수 있기에 유럽에서 몇 번 써먹은 주문법이었다.
잠시뒤 나온 와인은 언뜻 보아도 영 이상했다. 내 앞에 놓인 와인은 로제라기엔 너무 붉었다. 언니가 받은 화이트 와인 역시 화이트라 말하기 민망한 색이었다. 아무리 봐도 서빙이 잘못된 것 같았다. 언니에게 와인이 잘못 나온 거 같다 말하니 '설마'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색이 너무 붉었고 혹시나 싶어 한 모금 마셔보니 역시나 로제의 맛이라고는 볼 수 없는 도수 높은 떫은맛이 확 올라왔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쌓이던 불쾌감이 한 번에 올라 터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서버를 쳐다봐도 이쪽으로는 눈짓하나 주지 않는 것도 괘씸했다. 결국 한참뒤에야 직원을 붙잡고 서빙이 잘못되었다 얘기하니 그럴 리 없다며 웃으며 사라졌다. 어이없는 태도에 욕이 올라오려는 찰나 그새 주문서를 확인한 것인지 아까의 직원이 내 와인잔을 뺏듯이 가져가고 새로운 잔을 내려놓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와인과 추가주문한 맥주도 나쁘지 않았지만 직원 한 명이 유독 모가 났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에 비례해 불쾌함 역시 느꼈다.
잔뜩 찌푸려진 우리의 미간에 옆자리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20대 남자 대여섯이 장난스레 던지는 말은 나를 더 짜증 나게 할 뿐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의 기분을 풀어준 건 오히려 그 치들이 나가고 들어온 중년 남자와 그의 조카뻘 되는 남자였다. 둘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문어라고 답해주었다. 맛있냐는 물음에 언니는 과장을 조금 보태 이제껏 먹은 문어 중 최고라고 답해주었다. 우리의 추천대로 문어를 주문한 남자는 요리를 한입 먹고는 우리에게 따봉을 남겼다. 괜히 웃음이 나오고 불쾌했던 기분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영어를 잘 못했던 비교적 젊은 남자도 우리를 보며 연신 웃으며 엄지를 날렸다. 비록 잡음은 있었지만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이유로 기분이 좋아졌다.
도움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거창하겠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때론 나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밤거리를 걸으며 아까의 추천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이었는지 떠들었고 그 일행과 나눈 이야기를 복기했다. 조용한 남자가 강력히 주장한 포르투에서 꼭 먹어야 한다고 추천한 음식을 메모해 두는 건 덤이었다.
우리는 어제와 같이 광장 한편에서 경찰아저씨들을 토템 삼아 수다꽃을 피웠고 11시가 넘어 헤어졌다.
내일이면 언니는 또 나보다 먼저 이곳을 떠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포르토에 도착해서 언니를 또 만나기 전까지 혼자인 시간을 알차게 즐길 셈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밀릴 거라고는 예상 못한 빨래도 해치워야 하고 한 달간 고생한 가방끈도 수선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음 숙소와 교통 편들도 예약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노란색 트램을 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