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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5

돈은 버는 것도 쓰는 것도 어려워

by 강단화

2016.10.27

Lisboa, Portugal


게으름은 언제나 즐겁다. 놓쳐버린 아침이 그리워지기도 잠시 몸을 감싸는 안락함에 도로 눈을 감았다.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조식시간이 끝나있었다. 덩달아 세탁 수거시간도 끝나버린 바람에 빨랫감을 이고 지고 다음 도시까지 가게 되었다. 작은 것은 손빨래로 해치워서 다행이었다.


리스본에서 온전히 있는 마지막 하루를 즐기기 위해 버스표를 끊었다. 24시간권을 끊은 김에 뽕도 한번 뽑아먹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내일 떠날 버스표를 사러 터미널로 향했다. 딱 티켓만 사고 다시금 도심으로 돌아왔다. 지나가다 발견한 마트에서 물을 하나 사고 쇼핑거리를 천천히 구경했다.


들어가기도 겁나는 로고들을 재빨리 지나치고 뭐라도 살게 있나 싶을 때 쇼윈도로 보이는 스타킹들이 귀여워서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꽂히는 3명의 시선에 순간 내가 할 말을 까먹어버렸다. 잘 안 나오는 영어에 밖에서 사진을 찍고 들어올걸 싶었지만 친절한 직원은 나를 이끌고 쇼윈도를 직접 확인해 물건을 찾아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귀여운 고양이 무늬의 타이즈와 긴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스타킹을 구매했다. 내가 신으니 쇼윈도의 모델과는 좀 많이 다른 이미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고양이무늬의 타이즈는 단숨에 내 최애품의 자리를 꿰찼다.


쇼핑봉투를 소중하게 가방에 쑤셔 넣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와 트램을 갈아타며 도착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와 연이 깊은 장소였다. 리스본을 붕괴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닌 대지진을 용케 피해 간 이 수도원은 아직도 섬세한 조각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곳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교통권 뽕을 뽑기에는 아주 최적의 장소였다.


수도원 내부에 있는 회랑이 볼만하다고 했기에 나 역시 그 회랑을 노리고 찾아갔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바글거리는 관광객과 길게 서진 입장줄에 나는 깔끔히 입장을 포기했다.

대신 무료로 개방된 비교적 한산한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선들도 특이했지만 그 천장을 지탱하는 기둥이 세세한 조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대단했다. 꼭 황금과 보석을 바르지 않아도 '기술'만으로 만들어내는 '화려함'은 쉽게 찾기 힘든 것이라 그런지 더 눈이 갔다.


20161027_151054.jpg 언제나 그렇듯 엉망인 사진이다.


수도원을 벗어나 또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근처에 위치한 <벨렝탑>이었다.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작은 탑은 포르투갈이 해상무역을 지배할 때는 통관절차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지만 스페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정치범과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감옥이기도 했다.

물 위로 크게 떨어지지 않은 채 위치해 있어서 내가 보기에는 바람이 세게 불거나 밀물이 차오르면 물에 잠겨 버릴 것 같았는데 몇백 년이 넘도록 유지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멋있다고 들었지만 수도원도 안 보고 왔겠다 굳이 탑만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물에 잠길 듯 말 듯 떠있는 탑을 바라보다가 대성당으로 향하는 트램을 탔다.

트램의 종점에서 올라타니 운이 좋게도 편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적당히 흔들리는 트램을 즐기다가 대성당 앞에서 내렸다. 우직하게 서있는 성당은 종교적 건물이라긴 보다는 방어를 위한 성으로 보였다.

튼튼한 두 다리 사이를 지나 커다란 내부를 구경했다. 역시나 빛을 받아 보기 좋은 스테인글라스를 눈에 담으며 차가운 돌벽을 따라 걸었다.


성당을 나와 드디어 샛노란 트램을 탔다. 신식 트램과 달리 작은 골목과 언덕을 오르는 노란 구식 트램은 리스본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친구였다.

승차감 자체는 크게 특별하지 않았고 오히려 좁고 불편해 그냥 신식 트램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치솟았다. 좁은 골목을 운전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는 건 꽤 재밌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면 부러 이 트램을 타기 위해 돌아올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덕분에 언덕길을 편하게 내려왔다.


20161027_170931.jpg 관광객으로 가득 찼던 트램


다시 상업지구로 돌아왔겠다, 빨랫감이 잔뜩 쌓여 옷도 없겠다. 핑계에 나는 눈앞에 보이는 스파 브랜드로 들어갔다. 1시간 뒤 가게문을 나선 나는 가벼운 운동화와 모자 2개, 약간은 두꺼운 후드티와 치마를 손에 들고 있었다. 모든 구매는 이유가 있었다. 오래 신은 운동화는 발이 아플 정도로 밑창이 닳았고 한국에서 가져온 모자보다 따뜻한 모자가 가지고 싶었다. 빨래가 밀려 옷이 없는 것과 별개로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긴팔이 하나쯤은 필요했으며 스타킹을 새로 샀으니 그에 어울리는 겨울치마도 하나 사고 싶었다.


이렇게 한 번에 많이 옷을 샀던 적이 드물고 순수하게 혼자 산건 더 드문 터라 쇼핑백을 든 내가 낯설었다. 필요에 의해 구매했다 말했지만 약간의 충동이 있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은 더 이상 돈 쓸 일이 없겠지 싶었지만 상점에서 숙소로오는 10분도 안 되는 길에서 또 지갑을 열었다.

건물을 배경으로 노란 트램만 색이 들어간 흑백 엽서 한 장을 손에 쥐었다. 이 엽서는 누구에게도 부치지 않고 내가 가져야겠다 마음먹었다.


나에게 돈을 버는 건 당연하고 모으는 건 마치 사명과도 같은데 쓰는 거는 이렇게 어색하고 불안하다. 종이백 하나에 들어가는 이 옷들을 사려면 나는 몇 번이고 커피를 내려야 한다. 숫자를 보면 저절로 내가 팔아야 하는 커피 잔수를 계산하게 되는 스스로가 조금 질릴정도였다.


그럼에도 숙소에서 펼쳐본 옷이 너무 따뜻해 보여서, 새로 산 스타킹이 너무 귀여워서, 바꿔 신은 신발이 너무 편안해서 그냥 '잘 샀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상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새로 산 옷을 좋아하기만 하려 노력했다.

(이때 산 신발과 옷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지만 모자 하나만큼은 계속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이보다 더 편한 모자가 없어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자주 손이 간다. 그저 평범한 모자인데 훨씬 오래 손에 잡히는 게 참, 묘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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