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브랜디를 가득 넣어주세요
2016.10.29
Porto, Portugal
포르투갈에서의 소소한 장점이 있다면 모든 호스텔에서 조식을 준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보다 조식포함 옵션이 월등히 많고 가격도 합리적이며 품질자체도 괜찮았다. 리스본에서는 내가 고르는 대로 팬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해서 꽤 만족스러웠다. 포르투의 숙소는 팬케이크가 있지는 않지만 조식의 가짓수가 꽤 있었기에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조식을 먹기 위해 일어나고 씻고 나가야 한다는 게 너무너무 귀찮았다. 밥 먹으러 가는 것도 귀찮으면 어떡하나 싶지만 정말 귀찮았다.
아침을 챙겨 먹는 게 좋다고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막상 일어나서 바로 무언갈 씹고 먹는 행위는 너무나 귀찮다. 그럼에도 먹고 나면 오전이 든든해서 결국 매일아침 치열한(!) 고민 끝에 조식을 먹으러 나가곤 했다. 오늘은 같은 방을 사용한 한국인 덕분에 비교적 쉽게 일어났다. 제대하자마자 여행을 왔다는 T오빠는 같은 방을 쓰는 게 계기가 되어 오늘 하루 일정을 함께하기로 했다.
조식을 든든히 먹고 밀어두었던 빨래도 맡기고 숙소를 나왔다. 내가 세탁기를 돌리면 3시간이면 끝날 것을 빨래방에 맡기는 덕에 3일이 걸린다. 리스본에서 옷을 산 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노곤노곤한 햇살을 받으며 언덕을 내려가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건물을 보았다. 뭐 때문인가 슬쩍 고개를 빼 구경하니 그 유명한 '상벤투 기차역'이다. 기차역 내부에는 푸른색의 타일공예인 '아줄레주'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기차역을 이용하는 승객보다는 타일을 구경하러 들어온 관광객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나와 T오빠도 슬그머니 그 대열에 합류에 타일벽화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타일 위에 푸른 선으로 세밀한 그림이 펼쳐져있었다. 포르투갈에 와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던 타일벽화인데 아기자기한 역사 내부를 꽉 채운 것을 보니 새삼 예뻤다. 만약 내가 포르투라는 도시를 이 역을 통해 처음 들어왔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벽화를 본다면 정말로 단숨에 이곳이 좋아질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리스본의 나타가게에서도, 포르투의 길거리에서도 계속 봤지만 볼 때마다 색이 다양하지도 않은데 화려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농담(濃淡)의 아름다움이다.
안 그래도 좁은 내부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T 오빠와 나는 빠르게 감상을 마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의 목적지는 포르투를 가로지르는 도루강(Rio Douro) 너머의 와인 양조장 거리였다. 포르투는 마치 한강처럼 도시를 지나는 강을 끼고 번성한 항구도시였다.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 수많은 물품들이 오갔고 그중 제일은 '포트와인(Port Wine)'으로 부르는 와인이었다. 항구(Port)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 강변 양조장에서 양조된 와인들은 긴 항해를 버티기 위해 발효 중에 브랜디를 섞어 넣었다고 한다.
와인이라고는 레드, 화이트, 로제 와인밖에 모르는 '와알못'이지만 이곳에 왔으면 꼭 와인도 마시고 양조장 투어도 해보라는 조언에 힘입어 양조장 투어를 계획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멋들어진 다리를 건너 강변에 도착하자 수많은 양조장에서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리 검색해 둔 양조장을 찾아가 투어를 신청했다. 운이 좋게도 20분 정도 뒤에 시작되는 투어를 예약할 수 있었다. 날씨도 좋아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강변을 구경하고 있자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투어는 재밌었다. 아마 내용보다는 투어의 끝에 맛본 와인들이 재밌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재밌다는 감상이 컸다. 물론 영어로 이루어지는 투어에 정신이 뱅글거리고 그 와중에 T오빠에게 통역 아닌 통역까지 하느라 더 정신없었지만 거대한 와인통과 그곳에서 탄생된 와인들을 맛본 것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조금씩 따라진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입안에서 향기가 춤을 췄다. 진한 알코올향과, 오크향, 단 포도의 맛과 떫은 껍질의 맛까지 한 번에 치고 들어왔다. 뒤로 갈수록 설명을 놓치고 남는 건 취기뿐이었지만 이 순간 이후로 나의 와인취향이 시작되었다.
만족스러운 시음 끝에 투어가 종료되고 T오빠와 나는 바로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다. 식전주가 조금 거나했지만 본식 역시 만만찮게 푸짐했다. 우리는 큰 고민 없이 어제 E언니에게 추천받은 식당을 방문했는데 메인요리 두 개를 둘이 다 먹지 못하고 나왔다. T오빠의 컨디션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양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맛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자리를 뜨는 내내 더 먹지 못하는 위장을 원망할 정도였다. 정말 맛있는 한 끼였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으니 소화를 할 차례가 왔다. 포르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성당 옆의 전망탑을 올랐다.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 끝까지 오른 다음 맞이한 풍경은 장관이었다. 역시나 멋진 경치를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난이 필요하구나 싶었다.
전경을 보고 내려 와 목을 축이고 장을 봤다. 저녁으로는 고기와 계란을 잔뜩 넣은 비빔밤을 해 먹었다. 고추장을 챙길 때는 이게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들고 온 한식들 중 제일 많이 쓰는 녀석이 되었다.
2016.10.30
Porto, Portugal
조식을 먹고 튀어나오듯 길을 나섰다. T오빠와 또다시 일정을 함께했다. 트램을 타고 20분간 달려 도착한 곳은 서핑보드와 사람이 가득한 해변이었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중 동양인이라고는 우리밖에 보기 힘든 동네였다. 거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놀러 온지라 덜렁 혼자 나온 내가(물론 옆에 일행이 있긴 했지만) 묘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깐의 외로움은 묻어두고 해변을 걸었다. 바다는 어딜 가나 바다이지만 그래서 좋다. 맑은 날 물에 반사되는 햇볕과 파도소리.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바다내음은 고향을 떠났어도 고향의 바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동안 내륙에 위치한 독일을 도느라 반쯤 까먹을뻔한 바다내음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다시 실컷 느끼고 있다.
엄청 그립거나 간절하지는 않은데 막상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해변을 실컷 돌아보다 땀이 날 때쯤 다시 도심으로 돌아왔다. 늦은 점심으로는 맥도널드를 먹기로 했다. 시내에 위치한 맥도널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점'이라기에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다. 입구의 조각상이 멋지고 건물도 넓고 좋았지만 가장 중요한 맛이 없었다. 윽. 늦은 점심인데도 이렇게 맛없게 느껴질 수 있을까 싶었다.
(나중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뒤로하고 순수하게 맛으로 따진다면 헝가리 쪽의 압승이었다.)
숙소로 들어와 다음 일정도 대충 정리하고 짧은 휴식을 취했다. 저녁에는 T오빠와 야경을 보러 나왔다. 쫄보인 나는 일행이 있을 때만 야경을 보러 나갔기 때문에 숙소까지 같은 일행은 놓칠 수 없는 훌륭한 야경 메이트였다.
거대한 다리를 밑에서 올려다보고 반짝이는 강과 도시를 구경했다. 묘하게 파리의 에펠탑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다리는 실제로 에펠의 제자가 건축한 다리다.
계단을 타고 언덕을 올라 수도원에 다다랐다. 다리 건너편에서 강을 따라 반짝이는 도시가 너무 예뻤다.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품처럼 불빛들이 반짝였다. 하나하나 각자의 사정으로 켜둔 불빛이 멀리서 보니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핼러윈이 껴있는 주라 그런지 강변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핼러윈!'이란 느낌보다는 '파티!'라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꽤 즐거워 보였다. 낮에는 망토교복을 입은 사람들을 잔뜩보고 밤에는 가면 쓴 얼굴들을 가득 봤다. 낮은 <해리포터>고 밤은 <어벤저스>다.
달아오른 흥이 전염되었는지 나와 T오빠도 와인을 한잔 마시기로 했다. 적당히 조용한 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2유로를 주고받은 와인의 컵은 과장을 보태 내 얼굴만 했다. 조각케이크를 안주삼아 마셨다.
딱 기분 좋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일어나자마자 취기가 확 올라왔다. 와인은 보기보다 강하구나. 브랜디가 들어갔다했나? 달달해서 좋았지. 내일은 뭐 하지? 얼른 씻고 자야지. 아 그거 먹어야 하는데. 산발되는 생각은 침대에 누우자 빠르게 휘발되었다.
이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기 전에 와인을 마시는 거구나. 따라 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