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여덟 유럽일기 048

그대로인 듯 바뀐 모습이

by 강단화

2016.10.31

Porto, Portugal


숙취 없는 깔끔한 기상이었지만 나의 주량을 되돌아본 아침이었다. 그동안 맥주만 마시다 보니 와인의 도수를 만만하게 본 것 같았다. 다행히 숙소에 잘 들어왔으니 되었지만 어디 가서 술을 마실 때 더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은 저녁이었다.


오전은 반쯤 날려먹고 T오빠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오늘의 메뉴는 리스본 식당에서 만난 남자의 추천인 '프란세지냐'다. 알고 보니 포르투의 대표 음식이었다. 포르투식 샌드위치로 식빵에 햄과 고기를 껴놓고 그 위에 다시 치즈와 계란까지 올리는 듣기만 해도 무척 느끼해지는 음식이었지만 추천도 받았겠다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역시나 언덕을 오르고 내린 뒤에 동산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어디보다 핼러윈 장식이 가득이라 포르투에 와서 '핼러윈'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느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북적였다. 관광객도 있었지만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우리는 각자 맥주 한 병씩과 프란세지냐와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나는 어제를 교훈 삼아 무알콜 맥주였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음식이 나왔다. 다른 사람의 테이블에서 봤을 때도 충격이었지만 눈앞에 내려진 묵직한 샌드위치(?)를 보자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꼭 둘이 먹으러 가라 했구나. 절로 남자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E 언니에게 보낼 사진을 찍고 크게 반을 갈랐다. 겉을 둘러싼 감자튀김 사이로 두툼한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20161031_122740.jpg 굉장히 두툼했다


느끼한 걸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보기만 해도 입이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 딱 감고 이것도 경험이다. 생각하며 입에 베어 물으니 치즈와 고기와 빵이 한 번에 입안에서 뭉개졌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꽤 맛있었다. 자극적인 것에 자극적인 것을 더하고 탄수화물에 단백질을 더한 음식은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보기에는 세입만에 물려서 도망갈 것 같은데 막상 먹다 보니 중독적인 맛에 계속 손이갔다. 감칠맛이 챡챡 입에 감기는 게 맥주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주변의 감자튀김도 하나씩 해치우자 만족스러운 한 끼가 완성되었다.


식당을 나와 동산과 공원을 걸으며 부른 배를 소화시켰다. 관광지로 소란스러운 거리를 벗어나고 언덕을 오르자 강을 낀 포르투의 전경이 보였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서 실컷 풍경을 감상했다. T오빠가 들고 있는 카메라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여행을 다니며 배우고 싶은 게 참 많이 생각났다. 그건 때로는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예전부터 소망하던 것이기도 했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온다면 지금보다는 더 괜찮은 사진실력을 가지고 싶었다.


오후가 될수록 따가워지는 햇살에 근처 카페로 몸을 피신했다. 달콤한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오후의 햇살을 실컷 즐겼다. T오빠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드디어 도착한 내 빨래를 수령하고 정리했다. 손빨래와 다른 차원의 뽀송함이 기분 좋았다. 고추장을 쓱쓱 발라 만든 저녁과 함께 T 오빠가 가방이 무겁다며 꺼낸 기네스도 마셔봤다.

영국에서 사 왔다는 흑맥주는 첫 입에는 계피향이 올라왔고 뒤를 이어 약간의 떫은맛과 흑설탕맛이 느껴졌다. 맛있긴 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조금 늦게 방에 틀어박혔다. 새로운 룸메이트들과 인사를 하고 밀린 엽서를 정리하는데 옆침대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사각지대에서 느껴지는 사람 둘이 끌어안고 있는 실루엣에 절로 눈빛이 짜게 식었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맞은편 침대의 혼자온 브라질 출신 남자가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강가에서 핼러윈 파티가 있다며 이곳보단 나을 거라며 흘깃 윗침대를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벌써 시간이 10시가 다 되었다. 분명 나간다면 새벽에나 들어올 것이고 나는 굳이 위험과 피로를 감수하며 나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늦어서 그만 자야겠다고 대꾸하며 나는 이어폰을 흔들었다. 남자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며 방을 나섰고 나는 재킷을 안대삼아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커플은 더 뜨거워질(?) 계획은 없는지 약간의 소란만 유지했고 또 다른 룸메가 들어오자 조용해졌다. 가끔 나의 상식이 상식이 아닌듯해 혼란스러워진다. 하.



2016.11.01

Porto, Portugal


오늘은 늦잠을 핑계로 실컷 게으름을 피우기로 했다. 조식만 후다닥 먹고 올라와 핸드폰을 잡았다. 지금은 스페인으로 도로 떠난 E언니와 실컷 수다를 떨며 오늘의 계획을 짰다. 낼모레면 포르투를 떠야 했기에 그전에 캐리어를 사야 했다. 그리고 밀린 엽서를 보내고 사온 토마토도 먹어야 했다.

정리하다 보니 마냥 게으름을 피우기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생수병 하나를 옆에 끼고 캐리어를 살만한 곳을 검색해 봤다. 꽤 멀리 떨어진 아울렛을 제외하자 팍! 줄어든 후보지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분명 날짜는 11월인데 아직도 햇살아래에서는 땀이 났다. 언덕을 오르고 매장을 기웃거리고 다시 트램을 탔다. 문이 닫혀있거나 대형캐리어는 없다는 거절을 받고 두어 번의 헛방 끝에 쇼핑몰에서 캐리어를 파는 가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매장에 들어가 유독 나오지 않는 영어를 쥐어짜 내가 원하는 캐리어를 요청했다.


새로운 상황에서 영어를 해야 할 때마다 나의 영어실력의 한계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체크인을 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럽고 커피를 주문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내가 원하는 캐리어의 조건을 설명하려 하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영어실력이 그래도 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반복된 상황'에서만 강해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꾸준히 공부하란거구나. 꾸준히 공부 안 해서 피를 본 주제에 교훈만 얻었다.


손짓 발짓으로 얻어온 획득물은 까만 외관이 마음에 든 28인치 캐리어였다. 기존의 캐리어보다 한 뼘은 높아져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만큼 넓은 공간이 매력적이었다. 아마 아직은 없는 내 겨울옷을 잘 보관해 줄 것이다. 그동안 수고해 준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 새로운 곳으로 옮겼다.

처음 가져온 캐리어는 큰 이모의 것이었다. 빌려준다고 말한 것이지만 바퀴가 부서져 결국 돌려드리는 건 요원하게 되었다. 바퀴가 이상해졌을 때 그래도 빌린 거니 계속 끌고 다닐까 싶었지만 바로 버리고 새로 사라고 말해주어서 여러모로 마음이 편해졌다.


내용물이 텅 빈 캐리어를 보는 건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 위에 엎어져 가만히 기대 보았다. 두 달 동안의 내 집이나 다름없던 녀석이었다.


20161101_173011.jpg 세발로 포르투까지 버텨준 고마운 캐리어


일행도 없고 낮의 쇼핑으로 기운이 고갈되어 저녁은 대충 차려먹었다. 잔뜩 사 온 토마토에 빵을 곁들이니 들어간 수고에 비해 그럴싸한 저녁이 완성되었다. 가성비가 좋다고 해 사온 5천원짜리 와인은 미뤄두었다. 한동안 술은 안 마시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아깝긴 하지만 다음 도시로 갈 때 룸메에게 기부나 할 생각이었다.


이르게 하루를 마치고 일찍 자려던 나를 부른 건 캐나다에서 온 룸메이트였다. 식당에 다른 친구들도 있다며 나를 끌고 가 인사를 나누게 했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다들 영어가 유창했기에 금세 친구가 된듯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영어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지만 꽤 재밌었다. 사놓고 비우지 못한 와인을 기부하고 나는 만취한 사람들을 피해 뒷마당으로 도망갔다.


뒷마당에서는 다들 놀자판이 된것을 알았는지 호스텔 직원이 작게 불을 피워 캠프파이어를 만들었다. 불은 온기를 주기보다는 관상용에 가까웠지만 날씨는 따뜻했고 보기에 예뻤기에 만족스러웠다. 가족끼리 왔다는 포르투갈언니가 멋들어지게 한 곡조를 뽑았고 흥겨운 분위기에 옷까지 갈아입고 오더니 뱅글뱅글 돌며 춤을 췄다.

언니의 요청에 호스텔 직원이 옆에서 기타로 박자를 맞춰주었다. 돈을 주고 봐도 만족스러울 공연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적으려 하니 볼펜이 나오지 않았다. 가져온 볼펜 하나를 다 썼다. 신기했다. 매일 조금씩 적은 일기에 볼펜 하나가 동이 났다. 여행을 하는 두 달 동안 많은 게 바뀐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거 같다. 볼펜, 캐리어, 옷, 나. 바뀐 듯 바뀌지 않은 것들이, 바뀌지 않은 듯 바뀐 것들이 신기하고 낯설다.


낼모레면 이 도시를 떠난다. 유럽여행을 계획하며 준비했던 모든 것을 끝냈고 다음 목적지는 예상치도 못한 곳이 되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것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다. 커다란 목적들을 다 달성하니 어딘가 공허하면서도 편안했다.

좀 더 이 도시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있다. 따뜻함이 그리워질 도시에 가게 되니 떠나는 게 싫어진다. 그러면서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즐기고 싶다. 그리고 차갑고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떠날 것이다.


keyword
이전 07화열여덟 유럽일기 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