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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9

도전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니까

by 강단화

2016.11.02

Porto, Portugal


어제 늦게까지 놀던 룸메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아침 일찍부터 수선을 떨었다. 단 이틀 만에 미드 한 시즌을 주파한 것 같은 피로도가 스쳐 지나갔지만 나와 큰 접점은 없었기에 그냥 '저런 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덕분에 이른 기상을 했기에 그 점은 고마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식당으로 향해 조식을 해치우고 도로 침대에 앉았다. 어제 미리 정리해 둔 캐리어를 책상 삼아 밀린 엽서를 옮기고 다음 계획도 다시 한번 정리해 봤다. 그러던 중 있는지도 몰랐던 한국인 한 명이 불쑥 무례한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밤늦게 체크인을 하고 들어온 남자였는데 딱 하루만 있다 가는듯했다. 요 며칠 룸메이트 운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마음에 들어서 더 머물고 싶은 게 참 아이러니한 마음이다.


며칠 전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다가 얼결에 프라하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에서 프라하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지만 프라하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로 들어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리스본의 방세가 순간적으로 폭등했기에, 겸사겸사 포르투갈의 다른 도시도 볼 겸 포르투에서 남부의 '파로(Faro)'로 이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출국 하루 전에 리스본으로 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 후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이동한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어마무시하게 깨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얼렁뚱땅 효율은 내다 버린 여행이다.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숙소를 나와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동안 밀린 엽서를 부치고 숙소로 돌아와 물과 가방을 챙겼다. 긴 여정을 떠나기 전에 포르토를 더 즐겨야 했다.


언덕을 걸어 내려와 며칠 전부터 찜해두었던 "렐루서점"에 방문했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 동안 기대로 가슴이 동당거렸다. 서점은 작고 오래되었고 관광객들로 가득 차있었다. 예쁘지만 작은 이 서점의 하이라이트는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내려오는 계단이었다. 우아하게 휘어진 나무 계단은 마치 영화 속 장소에 들어온듯한 착각을 준다.


책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집필한 J.K. 롤링은 포르투에 머물며 보았던 것들을 책 속에 녹여내었다. 그중 발끝까지 오는 망토나 '그리핀도르'의 사자석상은 보았지만 책 속 '움직이는 계단'의 모티브인 렐루서점은 미뤄두고 있었다.

동행과 함께 오기에는 서점이 생각보다 작아서 작품의 팬이 아니라면 볼 게 없다는 리뷰가 마음에 걸렸었고 혹시나 책을 본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선뜻 오자 말하기가 미안했다.


20161102_132537.jpg 아기자기했던 1층 내부


마지막날 혼자서 방문한 서점은 만족스러웠다. 조금은 북적이는 소란스러운 내부도 나쁘지 않았다. 햇볕이 비추지 않는 소파에 앉아 자유롭게 책을 읽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다만 내게는 아쉽게도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았다. 포르투갈어로 된 코너를 지나쳐 그나마 익숙한 영어 코너를 기웃거렸다. 주제도 못 잡겠는 단어들 사이에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홀린 듯 들어 올린 책에는 대문짝만 한 히틀러의 얼굴이 박혀있었다. 유일하게 추론이 가능한 이야기에 별안간 그 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히틀러 평전인가 싶었는데 마약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대한 책이었다. 한국어로 읽어도 어지러울 것 같은 단어들이 쏟아졌지만 뭔 정신인지 한동안 그걸 읽고 앉아있었다.


2층을 둘러보고 다리가 아파올 때쯤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소소한 목표였던 <해리포터> 영문버전 책 찾기를 실패한 후였다. 포르투갈 버전은 화려하게 진열해 두었으면서 영문버전은 한 권도 없어 낙심했던 찰나에 뒤쪽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들을 발견했다.

커다란 트롤리에 불규칙하게 쌓여있던 건 내가 그토록 찾던 <해리포터> 영문판이었다! 잽싸게 1권을 손에 들고 계산대로 다가갔다. 들어오기 위해 구매한 티켓을 책과 같이 내밀자 티켓 가격만큼 책 값을 빼주었다.

한국의 돌이 섞인 단단한 종이와 달리 가볍고 작은 영문판을 손에 쥐고 룰루랄라 서점을 나왔다. 만족스러운 구매였다.


책이든 가방을 메고 동네를 걷다 보니 문득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고 따뜻했으며 안락했다. 내 찬가에 가까운 감상을 실시간으로 듣던 E언니는 그러다 눌러앉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할 정도였다.


마음의 양식을 채웠으니 신체의 양식을 넣어야 할 시간이 왔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향한 곳은 크게 영양은 없었지만 맛은 좋았던 프란세지냐를 파는 카페였다. 혼자서는 절대로 못 먹을 양에 느끼해서 두 입만 먹으면 질릴 것 같은 맛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또 먹고 싶었다. 아마 여기를 떠나면 또 먹기 힘들걸 알아서 더 그랬던 거 같다.


조금은 한가한 식당에 홀로 앉아 프란세지냐를 해치웠다. 당연하게도 다 먹지 못했다. 그래도 3/4은 먹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저녁도 안 먹어도 될 만큼 부른 배를 가지고 포르투 시내를 돌아다녔다.

빨간 지붕과 파란 타일들. 눈이 부시게 뜨거운 태양과 그 사이를 번잡스럽게 가로지르는 사람들. 기억하고 싶은 이 풍경들을 어떻게 다 담아갈까.


그동안 방문했던 모든 여행지를 손꼽아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말한다면 나는 잠시의 고민 끝에 포르투를 말한다. 그곳보다 더 재미있는 곳도 있었고 더 뜻깊었던 곳도 있으며 더 안락했던 곳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좋다'라고 느낀 곳은 포르투였다. 그냥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듯이 그냥 이유 없이 좋은 도시였다.

한동안은 왜 그곳이 좋았는지 설명해 보려 애쓴 적도 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냥 날씨가 좋았고 그냥 공기가 좋았으며 그냥 도시가 좋았다. '그냥' 그때의 나와 가장 잘 맞았던 도시였다.



2016.11.03

Porto, Portugal

Faro, Portugal


바뀐 캐리어가 훨씬 커다란 녀석이라 어색했다. 예전 캐리어처럼 잘 정리해 넣으면 공간이 너무 남길래 설렁설렁 정리하는 사치도 부려봤다. 내 파란 캐리어와 작별하고 깜장 캐리어를 끌고 머물렀던 숙소를 나섰다. 도시가 평온해서 좋았던 것과는 별개로 도파민이 장난 아니었던 숙소였다.


포르토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것도 버스를 이용하게 됐다. 첫날은 숙소를 오며 엄청 힘들게 오르막을 올랐는데 그새 노선의 수리(?)가 끝났는지 숙소 바로 근처까지 트램이 왔다. 얄밉기도 했지만 편하게 20분 만에 도착하니 좋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점심을 가볍게 해치웠다. 앞으로 6시간이 넘는 여정을 버티려면 든든하면서도 너무 먹어 속이 부대끼면 안 되는 적정 비율을 맞춰야 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몸짓으로 짐을 싣고 티켓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출발한 버스 창가로 내가 잠시간 머물렀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잔뜩 눈에 담고 싶었고 담았던 풍경들이다. 좋았던 장소를 뒤로하고 익숙해진 장소를 떠난다. 다시 시작이다.


20161103_130536.jpg 버스에서 봤던 루이스다리


3시간 반 만에 리스본에 도착해 발을 뻗었다. 화장실도 돈을 받는 유럽인심에 기분이 상하려다가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납득했다.

30여분 정도 기사님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도로 버스에 올라 다시 4시간을 달렸다. 예정과 달라지는 버스시간은 이제 그러려니 싶어졌다. 결국 파로에 도착해 숙소로 이동하니 9시 반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피곤함에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내가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호스텔에서 4박이나 잡은 게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입실 30분 만의 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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