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
2016.11.04 - 06
Faro, Portugal
조식이 충격적이게 맛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느낀 소소한 즐거움인 '조식 즐기기'를 강제로 빼앗겼다. 포르투도 리스본에 비해서는 아쉬웠지만 충분히 맛있었는데 이곳은 정말 먹을 게 없다. 독일에서 먹었던 조식보다 부실한 식단을 보자니 어젯밤에 애써 떠올렸던 긍정적 생각들이 휘발되었다.
호스텔의 첫인상이 썩 좋지 않다. 그 탓인지 도시에도 영 정이 가지 않았다. 아마 직전의 도시인 포르투가 너무 좋아서 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첫날은 밀린 예약을 몰아치고 식량을 사니 하루가 끝이 났다. 중간에 시내구경을 하기는 했지만 비수기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도시자체가 이런 것인지 망해가는 테마파크 느낌이 났다. 아빠가 농담 삼아 서구를 비유할 때 사용하던 '과거의 영광을 놓지 못하는'분위기다.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많은 관광식당을 매울 만큼은 아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묘하게 느껴지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나의 컨디션 탓인지 도시 탓인지 감이 안 왔다.
삼 일간 시내만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긴 무리라 생각되어 근처에 위치한 라고스(Lagos)를 방문하기로 했다. 원래는 라고스에 숙소를 잡고 싶었지만 예산과 날짜에 맞는 숙소가 없어 파로로 눈을 돌렸었다. 얼마나 좋으면 비수기인 이때도 사람이 몰리나 싶어서 한번 방문해 보기로 했다.
전날 알아본 라고스행 기차가 인터넷으로 예약 가능한 좌석이 없다고 나와서 조금 두려웠지만 막상 기차역에 가니 인터넷 판매를 안 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인지 텅텅 빈 열차가 나를 맞이했다.
왕복 11유로의 종이표를 손에 쥐고 열차에 올랐다. 가만 생각해 보면 독일을 떠나 처음 타는 열차였다. 그동안 지하철은 탔어도 지역열차는 처음이었기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딱딱한 의자도 얼추 낭만으로 표현할만한 기분이었다.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라고스는 온몸으로 '휴향! 레저!'를 외치는 듯한 곳이었다. 비수기임에도 가득 찬 보트와 관광객들이 도시를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파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인파인데 두 도시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영 모를 일이었다.
시내를 지나 해변으로 걸어갔다. 약 한 시간가량의 길이었지만 보기 좋은 풍경 덕인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조금은 따갑다 싶은 햇살과 조금 과하다 싶은 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해변은 꽤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해변으로 선정되었었다는 것 치고는 조금 작았지만 왜 그런 수식이 붙었는지는 충분히 이해됐다.
시야에 보이는 갈색의 암석들 사이로 푸른 바다와 하늘이 펼쳐졌다. 모래사장을 걸으며 그 전경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암석에 다가가면 사람이 지나갈만한 길이 보였다. 안전장치 하나 없어 보이는 절벽 아래를 여상스레 걷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또 다른 비밀스러운 해변들과 괴석들이 나온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미로 한벽을 거대한 바다가 막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거대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파도가 치는 괴석옆으로 다가가는 사람들과 몸이 휘청일 만큼 거센 바람을 맞다 보면 절로 겸손함이 생겨났다. 커다란 암석 밑으로는 작게 나있는 길과 동굴들이 가득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고 동시에 기묘했다. 포르투갈의 최남단에서 왜 제주도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의 풍경도 스쳐 지나갔다.
서양인들의 무모함을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내 안전불감증이 조금 약했다. 숨겨진 작은 공동을 탐험하는 것도 즐거웠겠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너무 거세고 관광객도 별로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 나왔다. 대신에 방파제처럼 보이는 돌무덤에 걸쳐 앉아 일기를 쓰고 바다를 구경했다.
한동안 햇살을 즐기다 암석을 내려오니 상의를 깨벗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일행과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데 주위의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고 했다. 사진 실력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거절할 일도 아니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웃통을 까고 어깨동무한 두 명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제는 보는 것도 어색한 필름카메라는 덤이었다. 아마 친구나 연인이었던 것 같은데 여행지에서 필름 카메라로 한 장씩 사진을 남기고 있다고 했다. 꽤 좋은 추억인 것 같았다. 나중에 나도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오자 마주한 것은 침대 위를 기어가는 빈대였다. 여태껏 잘 피해 다닌 베드버그를 만나니 절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재빨리 잡고 호스텔 직원에게 전달했다. 환불은 바라지도 않았고 침대를 바꿔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직원은 그 흔한 'Sorry' 한마디 없이 환불은 안되며 오히려 내가 빈대를 데려온 게 아니냐는 의심을 펼쳤다.
나는 환불의 '환'자는커녕 침대나 바꿔달라고 찾아간 것인데 숫제 범인 취급하는 게 짜증이 났다. 표정을 굳히고 내 전 호스텔들은 멀쩡했다 말하며 그냥 침대나 바꿔달라는 말에 직원은 남는 여성전용방이 없다며 내게 혼성 방을 내어주겠다고 말했다. 지금 두 명만 머물고 있기에 더 좋은 곳이란 젠체는 덤이었다. 그 두 명이 중년남자라는 건 쏙 빼놓고 내린 계산이다. 직원의 태도도 결과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별 방도가 없었다. 부디 벌레에 물리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새로 바뀐 방에서 눈을 뜨자마자 빨래를 돌렸다. 다행히 빈대에 물리지는 않았는지 아직까지 간지러운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침대에 올려둔 옷들이 불안했던지라 아침부터 세탁기를 돌렸다. 건조기를 물어보는 내게 돌아온 대답은 옥상이었지만 단 2시간 만에 바싹 마른 옷을 보자니 이해가 되는 답이었다. 빨래를 하다가 만난 한국인 여행객과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도 잘 갔다. 이상하게 파로에서는 계속 중년남자와 대화했다.
어제 새로 만난 룸메이트 중 한 명은 프랑스출신 여행자로 다행히 친절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내가 만난 첫 '동안 서양인'이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중년이라기에는 조금 젊은 남자였는데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호스텔에 불만이 많아 보이던 그는 새벽에 문을 따고 들어와 뻗은 호스텔 사장의 친척을 보고는 이른 아침 숙소를 옮겼다. 그렇다. 이 호스텔은 방범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새벽에 술냄새와 함께 방에 들어와 뻗은 중년 남자를 보고 경악했고 옆자리 프랑스 아저씨가 전해준 그가 호스텔사장의 친척이며 밤에 아무 빈 침대에서나 잠을 잔다는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저씨는 웃으며 그는 술 마시고 들어와 자는 것뿐이라며 오후까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 여행하며 가장 불편했던 1박이었다.
빨래를 돌리다 만난 한국분은 우리 아빠보다도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혼자서 여행 중이며 더 남쪽으로 내려가 꼭 가보려던 모로코를 갈 거라고 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에 자신감 넘쳐 보였지만 어딘가 허술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파로 해변을 보러 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려했던 곳이기도 했고 내 안의 유교걸이 어른이 말하는 걸 거절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꽤나 피곤한 하루에 내 성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까칠했지만 다행히 아저씨는 내 성질을 지적하는 대신 웃기를 선택하신 것 같았다. 파로해변에 도착하자 어제의 라고스와는 180도 다른 해변이 나를 맞이했다. 돌은커녕 섬하나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거구나 싶은 바다였다.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바다와 하늘뿐이었다.
바다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장을 보았다. 저녁은 본인이 맛있게 할 수 있다며 아저씨가 호언장담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결과는 기름대신 식초를 두른 팬으로 조리한 볶음요리와 수란이라기에는 조금 넝마가 된 계란이었다. 언어와 장비의 한계로 우당탕탕 이루어진 요리였지만 꽤 맛있었다. 아빠가 해주는 요리가 쬐금 그리워졌다.
아저씨와의 대화는 즐겁기도 하고 조금 피곤하기도 했다. 특히나 아빠와 비교되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아빠와도 대화를 하다 보면 피곤하다고 느낄 때가 가끔 있었지만 '보통의 중년남성'은 그와 비교도 안되게 더 더 더 피곤하고 지친 상대였다. 나쁘다기보다는 피곤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지친 티가 꽤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아저씨는 나를 좋게 봤는지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며 작은 실팔찌를 주었다. 작은 간식과 즐겁게, 조심히 여행하시라는 말밖에 건넬 게 없어 아쉬웠다.
지루해 미칠 거라 생각한 파로의 4박은 의외로 잘 흘러갔다. 조금 필요이상 길게 머물렀지만 라고스의 해변은 아름다웠고 예상치 못한 인연도 내 시간을 풍족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3박만 예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