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 다른 사람 다른결과
2016.11.07 - 08
Lisboa, Portugal
Berlin, Deutschland
드디어 파로를 떠난다! 좋기도 하고 조금 피곤하기도 했던 넉넉한 일정을 마치고 빡쎈 이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맛은 없지만 배 채우기에는 좋은 시리얼을 퍼먹은 다음 끝까지 도움을 안주는 호스텔직원에게 키를 반납하고(정작 문이 고장 나서 아무도 키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호스텔을 나왔다. 막상 떠나려니 아쉬움은 무슨 홀가분함에 얼른 버스가 출발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룰루랄라 버스에 올라타니 말 안 통하게 생긴 할머님이 내 자리에 곱게 앉아계셨다. 유럽에서 이용한 버스회사들은 대부분 사전좌석예약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나는 좀 더 편안한 여정과 풍경감상을 위해 가능한 창가자리를 지정해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지정해 놓은 소중한 자리인데, 뜬금없이 통째로 빼앗겨버렸다. 하하. 내 표를 보여줘도 그냥 웃으면서 옆에 앉으라고만 하고 일어날생각을 안 한다. 기사아저씨에게 헬프를 쳐보니 그냥 웃으며 몇 마디를 건넬 뿐 둘 다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쯤 되니 어차피 추가요금도 없었겠다, 피곤해져서 그냥 옆에 앉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내내 '그럴 수 있지'와 '하지만'이 공존했다. 좀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나 싶은 자책과 하지만 할머니인데 하는 유교-걸 마음이 계속 부딪쳤다. 버스가 연착되어 한참을 출발하지 않아 더 그랬다. 아예 출발하면 맘 놓고 자겠는데 움직이지도 않는 버스에서 30분 동안 앉아있으려니 그것 역시도 고역이었다. 풍경이 바뀐다는 게 내가 버스를 탈 때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키 포인트였나 보다.
늦은 버스는 한참을 달려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지난번 묵으려다 공실이 없어 실패한 호스텔을 예약했다. 나름 추천받았던 곳이라 단 1박이라도 약간의 기대가 샘솟았다. 체크인을 하고 4인실을 배정받았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 직원분이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셨다. 직전과 가득되는 대비에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겨울옷을 사야 한다는 나의 말에 직원은 지도를 꺼내 들고 가게이름을 줄줄줄 쏟아내며 색연필을 휘저으셨다. 짐을 정리하고 받은 지도를 챙기고 호스텔을 나섰다. 역시나 뒤에서 들리는 친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편해진다.
'필요'라는 이름을 붙인 쇼핑이 얼마나 깐깐해지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번에 리스본에서 한 '쇼핑'의 여파일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꼭 필요하지만 비싼 외투가 마음에 드는 걸로 찾기 힘들었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아쉬웠다. 이러다 겨울외투 하나 없이 독일로 가겠다는 걱정이 생길 때쯤 마음에 드는 야상을 발견했다. 예전부터 하나쯤 가지고 싶었던 야상에 주머니도 많고 커다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렴했다! 인터넷에 같은 모델을 검색하니 거진 40%는 더 저렴한 거 같았다. 마음에 얼추 드는 옷의 출몰과 다 떨어지는 체력이 만나 쇼핑이 종료되었다. 니트와 바지, 두꺼운 겨울양말까지 구입하니 독일의 겨울을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부디 생각만큼 따뜻하기를.
호스텔에 올라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린 탄산을 마시기 위해 닫아놓은 뚜껑을 돌리자 헛손질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걸어 다니는 동안 내부에 탄산이 꽉 차버린 것인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결국 도구의 힘을 빌리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도구로도 안 열려서 버릴까 하던 그때 마침 콜라병 하나를 못 열고 끙끙되는 나를 발견하고 마초성을 자랑하고 싶은 남자 두엇이 다가왔다. 금방 열어 주겠다며 실실 웃으며 콜라를 가져간 근육맨 미국인은 세 번 만에 도망갔고 그 꼴을 비웃던 친구도 두 번 만에 버리라고 외쳤다. 얼결에 내 콜라는 로비와 주방에 나와있던 남자들의 쫀심에 불을 붙여버린 듯했다. 거진 5명 이상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안 하던 콜라는 마지막으로 도전한 호스텔 직원손에 열렸다. 헬스 근육은 다 소용없었다. 역시 근육은 생활근육! 감사히 받고 잘 마시고 다음날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뺏겼다.
아침에 일어나 맛있는 조식을 먹었다. 얼마만의 만족스러운 조식인지 모르겠다. 요청하면 만들어주는 스크램블과 크레페는 속을 데워주어서 좋았다. 맛있는 밥도 좋았지만 호스텔 자체도 1박만 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꽤 마음에 들었다. 호스텔 사장님처럼 보이는 직원분은 무언갈 요청받았을 때도, 그냥 말을 건넬 때에도 항상 웃고 있었고 말끝마다 애칭도 꼭꼭 붙여 사용했다. 좋은 아침이라는 의례적인 인사에도 마이디어(My Dear)가 붙은 답이 돌아오니 조금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꽤 재밌었다.
구워주는 크레페를 든든히 챙겨 먹고 오전에 숙소를 나왔다. 어제 못 산 겨울신발을 마저 사고 지난번에 너무 맛나게 먹었던 에그타르트도 사서 먹었다. 다행히 쇼핑이 내 기준으로는 꽤 열량이 소모되는 행위인지라 시나몬가루를 뿌린 타르트 두 개쯤은 가뿐했다.
한 번 더 느긋하게 동네를 구경하고 2시가 넘어가자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좋은 여행이되라는 가벼운 인사가 진짜 여행을 좋게 만들어 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그렇다. 기분은 기분일 뿐이다. 유럽 공항에는 무슨 마가 끼어있는지 하나같이 친절하면 죽는 병에 걸렸나 싶었다. 고향이 고향인지라 비록 국내선이지만 비행기 수속이 어렵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데 여행 와서는 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언어의 문제가 제일 크지만 시스템이 다른 것도 한 몫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들이 일을 안 한다. 이번에도 항공사 수속대에 갔더니 자기는 수속을 안 한다며 나를 훠이훠이 쫓아냈다. 친절하지 않아도 평범한 말투로 말하면 어련히 알아서 갈 텐데 무례한 손짓에 표정과 말투마저 더할 나위 없이 싸가지가 없었다. 그럴 거면 왜 앞에 있는 다른 직원이 넥스트를 외친 것이며 비어있는 너의 카운터는 무엇이고 내가 떠나자 뒤에 오는 외국아재를 도와주는 것은 또 무엇이냐. 소심하게 마음속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올려주고 옆에 있는 다른 직원에게 다가갔다. 마침 직전의 사람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네 가지 없는 직원덕에 기분이 팍 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클레임을 걸어본 적 없는데 외국이라고 가능할까. 아 설마 이래서 동양인들에게 무례한 건가?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기분이 다운되었다.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나은 거라 생각하며 바쁘게 보안검색대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독일에서 들어올 때는 문제가 안되었던 선크림을 빼앗겼다. 이미 많이 쓰기도 했고 뽕도 뽑은 녀석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유럽이라고 모든 규정을 공유하는 게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배웠다. 정신 차리자. 그리고 어제 먹다 남은 콜라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빼앗겼다. 열어준 덕에 거진 다 마셨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저녁 비행기에 독일로 가며 시차가 +1시간까지 되어서 착륙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있었다. 짐을 찾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는데 깜깜한 풍경에 더럭 겁부터 났다. 그래도 이용객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버스에 타는 관광객이라곤 나 혼자 뿐이고 그나마 두엇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퇴근길인지 형광색의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그들을 기다렸다가 아저씨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혹시나 버스를 잘못 탄다면 수습하기 아찔해질 것 같아 몇 번이고 번호와 목적지를 확인했다. 비행기에 충전포트가 없어서 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했기에 구글맵을 계속 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뒤에 타라는 아저씨의 시원스러운 컨펌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간덕에 표를 못 샀다는 내 말에도 아저씨는 그냥 타라고만 하셨다. 목적지까지 달달 떨고 있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오니 아저씨가 다시 한번 알려주셨다. 내리면서 소심하게 고개만 끄덕인 게 아쉬워졌다. 좀 더 크게 '당케'나 하다못해 '땡큐'라도 크게 외칠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았다. 얼떨결에 받은 호의에 제대로 된 감사를 전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친절한 기사님 덕분인지 아니면 결연하다 못해 비장한 내 표정덕인지 나는 밤 12시에 무사히 호스텔에 입성할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문을 열자마자 환한 불빛과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들의 술주정이 처음으로 내게 안심을 주었다. 누군가의 술 취한 목소리가 안심이 되는 경우는 오늘 빼고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듯하다.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풀었다. 내일, 이제는 오늘이 되어버린 하루를 베를린에서 쉬고 모래에는 드디어 프라하다. 가겠다고 마음먹은 지 거진 열흘 만에 프라하로 간다. 정말 얼렁뚱땅인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