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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53

군중의 소음과 백색소음

by 강단화

2016.11.11 - 13

Praha, Česká republika


아침에 신나게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가 발이 시려 나온 지 5분 만에 도로 숙소로 돌아갔다. 기껏 사놓고 버릇처럼 운동화를 신은 내가 우스웠다. 구글맵을 부여잡고 어제는 시간이 늦어서 못했던 가장 중요한 볼일을 보러 향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아저씨인지 청년인지 나이 가늠이 안 되는 직원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억양이 강하고 빠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돈을 지불하면 나의 핸드폰 같던 벽돌은 인간의 과학발전의 산물이자 여행자의 절친한 친구 스마트폰으로 탈바꿈되어 온다.

저장해 놓은 구글맵이 안 열릴까 노심초사하고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를 찾기 위해 스타벅스 로고만 찾아 헤매던 과거는 사라지고 팡팡은 아니지만 통통 터지는 데이터가 내 손에 들어왔다! 정말 데이터 터지는 핸드폰 없이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이제는 가고 싶은 길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21세기 버전의 최신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두려울 게 없지는 않고 조금 덜했다. 돌길을 밟아가며 아기자기한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제껏 다녔던 여행지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관광객이 많은 동네라 그런지 어딜 가든 정신이 없다. 프라하의 트레이드마크인 카를교를 가기 위해 작은 건널목을 기다렸는데 한 번에 거진 50명은 되는 사람들이 그 건널목을 건넜다. 정말 좁고 짧은 건널목에 사람이 몰리다 보니 절로 아연해졌다.

거대한 인파에 치이느라 진이 빠져서 서둘러 숙소로 복귀했다. 오는 길에 당충전으로 구매한 굴뚝빵은 덤이었다. 그러나 좋은 냄새가 나고 맛있어 보이던 빵은 한 입 물어보자 입천장이 까질 만큼 거칠고(바삭한 게 아니라 거칠었다.), 질기며 차갑고 느끼했다. 당을 채우기는커녕 스트레스 수치만 올라갔다.


마치 사냥의 실패한 동물처럼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다시 길을 떠났다. 언제 가든 즐거운 마트로 들어서자 줄어들었던 자신감이 샘솟고 사라졌던 활력이 되돌아왔다. 몇 가지의 재료를 구매하고 사랑스러운 물가에 행복해하며 두 손 가득 수확물을 들고 숙소로 복귀했다.

저녁메뉴는 유튜브에서 배운 까르보나라와 아빠에게서 배운 감자채볶음으로 결정되었다. 마트에서 사 온 필스너를 곁들이니 썩 그럴싸한 한상이 완성되었다. 어째서인지 필스너는 독일에서 마실 때보다 더 맛났고 감자채볶음은 아빠가 해주던 맛은 아니었지만 안주로 딱이었으며, 비록 까르보나라는 국물이 흥건하게 생겨버려 조금 아쉬웠지만 정통(?) 이탈리아 아저씨의 레시피를 따랐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복작이는 사람들과 새로 바뀐 화폐와 언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새 기른 앞머리가 눈을 찔러서 가위를 빌려 조금 다듬었다. 거울도 없이 서툴게 잘라내는 머리는 아주 조금이었지만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나 머리를 자를 정도로 오래 집을 떠나와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상기시켜 주었다.


아기자기했던 작은 시가지


어제의 게으름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자 했건만 어림도 없다. 어제 돌아다닐 때는 분명 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씻고 난 이후부터 몸이 영 이상했다. 결국 한기가 들어버린 몸에 허리까지 아파와서 이른 기상은 마치 꿈처럼 날아가버렸다.

준비를 하고 나와 가장 먼저 ATM을 찾아갔다. 카드 수수료를 계속 내는 것보단 한 번에 수수료를 내고 현금을 뽑는 게 나을 듯해서였는데 인출단위가 너무 크게 세팅되어 있었다. 따로 입력하는 칸을 본 거 같기도 하지만 순간적으로 환율을 착각해 예산보다 더 많은 금액을 인출해 버렸다.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졸지에 현금부자가 되어버렸다. 재입금도 안 되는 터라 난감했다.


남으면 마지막날 기념품이라도 사기로 했다. 실수로 0을 하나 더 안 붙인 게 어디냐는 자기 위로도 했다.

묵직한 지갑을 들고 프라하성의 입구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줄을 통과해 보안체크를 마치고 또 기다림을 거쳐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티켓을 사는데만 거진 40분이 걸렸다. 좀 더 일찍 오거나 미리 표를 구매했다면 줄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둘 다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빨로 오렌지를 까먹는 인간에게 철저함을 기대하면 안 되는 법이다.


'독실한', '신실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교회나 성당을 공짜 휴게소 취급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기도를 휴대폰 메모장 쓰듯이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프라하 성에서 제일 볼만하다던 성당에서 보는 전경은 보지 못했다. 하필 내가 방문한 그때 성당의 높은 분이 오신다나 뭐라나.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입구컷을 당했다.

다행히 1층은 공개 중이었기에 볼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시선을 끄는 스테인글라스는 프라하에서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거의 줄지어 보듯이 관람해야 했기에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거의 치이다시피 구경하다 보니 우연히 가이드투어 무리에 같이 껴 성당을 보게 되었는데 다른 건 다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성인의 무덤을 빼곡히 둘러싸고 한 바퀴 돌 때는 조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백 년 전 죽은 사람의 무덤을 이렇게 나노단위로 뜯으며 봐야 하는 걸까? 싶었다. 고고학적 유물도 아니고 역사적 가치도 잘 모르겠는데 화려하게 은박을 입힌 관을 5분쯤 바라보고 있자니 저기 누워있는 무언가도 민망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무덤 뺑뺑이를 탈출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성당을 나왔다.


비록 성당 위에서 전경은 못 봤지만 성의 부지 자체는 재밌었다. 화려한 귀족들의 공간아래로 이어지는 아지자기한 길인 '황금소로'까지, 건물하나만 띨롱 놓여있는 게 아니라 성곽 안의 부지와 건물을 돌아다니며 볼 수 있어서 탐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비록 내가 있는 건물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구글맵과 브로슈어를 탈탈 털었지만. 그래도 꽤 즐거웠다.

(후에 동생이랑 다시 가며 느낀 것은 이때의 내가 정말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곳을 방문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본 것도 좋았고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알고 가면 더 재밌다는 말은 어느 여행지나, 특히나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여행지에 잘 부합하는 말 같다. '카프카'의 글을 읽고 '카프카의 방'을 보는 것과 아무 정보 없이 '어느 소설가의 방'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제 와 다시 간다면 나는 아마 16년도에 혼자 느꼈던 것도, 나중에 동생과 함께했을 때 느낀 것도 아닌 새로운 감정을 얻을 수 있을 거 같다.)


숙소로 오는 길에 당충전용으로 젤리를 구매했다. 마치 해적선같이 꾸며진 가게내부는 온갖 종류의 젤리와 사탕으로 가득했고 나는 이게 상술이며 이곳의 젤리나 한국의 젤리나 같은 맛임을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그것에 넘어가 설탕덩어리를 구입했다. 젤리빈하나를 입에 털어놓으니 익숙하면서도 한동안 먹지 않았던 단맛이 입에 퍼져나갔다. 설탕과 감미료, 젤라틴의 조합일 뿐인데도 나의 몸은 기꺼이 그 조합물에 기뻐하며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슈가하이(Sugar high)란 참 신기한 작용이다.


저녁으로 길거리 피자를 해치우고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룸메이트와 야경을 구경했다. 이미 투어를 들은 전적이 있는 그분 덕에 최고의 야경스폿을 볼 수 있었다. 혼자 나가기 무서운 밤거리도 일행만 있다면 겁날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일행이 말까지 통하면 더 좋고. 야경을 보고 오는 길에는 역시나 맥주 한잔을 사들고 들어왔다.

룸메덕에 야경구경을 실컷 했다. 나야 인연이 없지만 오늘 프라하의 야경을 보니 왜 사람들이 이곳에 연인과 함께 오라는지 이해가 가는 밤이었다.


어제에 이어 2연타로 뻐근 거리는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풀고 밀린 엽서도 쓰고 앞으로의 계획도 대충 세우니 금방 시간이 지나간다. 안 그래도 겨울이라 해가 짧은데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하루가 금방 어두워진다. 더 늦기 전에 준비를 하고 추천받은 성벽(?) 나들이를 나갔다.

유럽여행 카페에서 추천받은 프라하의 성곽길은 아직은 한국 관광객들이 덜 찾아가는 곳 같았다. 그래서인지 정보도 별로 없었고 교통편도 그리 편하지 않아 조금 걱정스러웠다.

특히나 성벽을 오르는 첫 입구가 너무 무시무시해서 절로 헉소리가 나왔다. 가파르게 이뤄진 오르막길에 절로 뒤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등반 같은 스타트를 끊었다.


가파르고 끝없이 보이던 길도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다. 아래에서 볼 때와 달리 생각보다 훨씬 금방 끝나는 오르막길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성벽에 오르고 평지를 걷기 시작하자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탁 트인 시야아래로 이제는 익숙해진 붉은 지붕들이 가득했다. 한편에는 내가 오르지 못한 성당도 보였다.

바람은 땀을 식혀줄 만큼 적당했고 중간중간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전경은 평안했다. 가끔가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현지인들뿐 한국인은커녕 관광객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성벽길은 단숨에 프라하에서의 내 최애 장소로 등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이틀간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치이며 빨렸던 기운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체코인지 미국인지 모르게 들렸던 영어들이 사라지고 감도 잡히지 않는 체코어만 귀에 들려왔다.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그 작은 백색소음이 오히려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만족스럽던 성곽길


빙 둘러 길을 걷고 나니 내가 올라온곳과 다른 '진짜'입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올라온곳은 근처 주민들이 이용하는 샛길이었던듯하다. 뭐든 높이 있는 곳이니 올라올 때 힘들기는 하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 빠르고 힘들게 올라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의도치 않았지만 지름길을 이용했다.


풍경을 구경한 것도 산책은 산책이라고 뱃속에서 음식을 요구했다. 근처에 평점 좋은 식당을 검색하고 자리를 잡았다. 가성비보다는 조금 가격대가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느끼하고 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그래도 내가 느끼한걸 잘 먹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어림도 없다. 특히나 국물이나 소스가 느끼 한 것에 쥐약이었다. 그래도 배를 채웠다는 것에 만족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쌌다. 내일은 근교의 마을로 내려갈 참이다. 또다시 장거리 버스여행이지만 이젠 3시간쯤은 장거리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계속 불편한 허리는 살짝궁 걱정된다. 부디 별 탈 없이 다음 숙소에 도착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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