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이 서툴고 낯섦에도 신기하고 좋아서
2016.11.09 - 10
Berlin, Deutschland
Praha, Česká republika
어딜 가든 게으름이 최고다. 여행 중에 부지런을 떤 경우는 손에 꼽을 거 같은데 어째 게으름은 피우면 피울수록 더 중독된다. 어제는 이동했으니까, 어제는 긴장했으니까, 늦게 잠들었으니까, 잠자리가 불편했으니까. 온갖 변명으로 게으름을 정당화시키고 오후가 되어서야 호스텔문을 나섰다.
이동하느라 동이 난 물창고도 채워 넣었다. 급하게 산덕에 조금 비싸게 사서 아쉽지만 물먹는 하마는 별 수가 없다. 하루에 1L를 마시는 것인지 잠깐 신경을 안 쓰면 금세 마실물이 동이 나 버린다. 시원하게 갈증도 해결했겠다, 시내를 싸돌아다녔다. 거의 한 달 전에 방문했던 거리인데 걷다 보니 길이 생각나는 게 신기했다. 살던 곳도 아닌 여행지의 길을 외우고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 능숙히 그 길을 걷는다는 게 굉장히 특별한 기분을 주었다. 그리고 덕분에 내 기억력과 방향감각이 완전 최악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베를린은 참 여러모로 인상 깊은 도시다. 다시 '돌아온' 첫 번째 유럽의 도시이기도 했고 발이 부르터라 박물관을 쏘아 다녔던 기억도 좋았다. 전혀 연고 없는 도시에 한 달만의 재방문이지만 괜히 도시가 반갑고 익숙한 것은 오랜만의 독일인 것보단 베를린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딱히 친절하지는 않지만 모노톤의 사진에 떨어트린 청색 물감처럼 인상 깊은 도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길을 걷다가 식당을 들어갔다. 메뉴는 커리부어스트였다. 베를린에서는 매번 이 것만 먹나 싶지만 맛있는 걸 어떡할까. 메뉴판을 뚫어져라 바라봐도 결국 마음이 가는 것은 커리부어스트다. 탄산음료도 하나 같이 끼고 창밖구경을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베를린에서 먹는 소시지가 제일 만족스럽다. 감자튀김에 뿌려진 마요네즈는 덤이다. 꽤 느끼하게 느껴질 조합이지만 내 몸은 내 생각보다 느끼한걸 더 잘 먹는 것 같다.
마지막 조각까지 스프라이트와 깔끔하게 넘기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한 달 사이 더 짧아진 해 덕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해가 져가는 기분이었다. 게으름의 결과가 꽤 가시적이다.
도시를 돌아다니다 너무 늦지 않을 시간에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잠깐의 마트구경에서 건진 간식거리도 손에 챙겼다. 어딜 가든 마트구경이 제일 재밌다. 이름도 생김새도 낯선 물건들을 구경하고 어쩌다 익숙해진 게 보이면 괜히 반가워하며 한 번 더 가격을 쳐다본다. 그렇게 눈으로 마트를 즐기고 빈손으로 나오기에는 민망해서 입장료인 셈 치고 작은 과자나 젤리 따위를 사고 나왔다.
해가 거의 지고 숙소로 들어왔는데 아직도 밤이 길었다. 이번에 베를린에서 머물게 된 숙소는 4인실 혼성룸이었다. 저번에는 남자 셋에 나 하나라 조금 불편했지만 이번에는 나 말고도 네덜라드출신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서 조금 괜찮았다. 어제 잠깐 인사를 나눈 룸메들은 모두 개성이 강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우연히도 모두가 이르게 방에 돌아와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자 자칭 무정부주의자인 브라질출신의 남자는 맥주를 마시겠다며 로비로 나갔고 나는 남아있는 프랑스출신 미국아저씨와 네덜란드 언니와 함께 신나게 수다 삼매경으로 빠졌다. 다들 강한 특색만큼 말할 거리도 많아서인지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명이 샤워를 하러 나가면 남은 둘이 신나게 수다를 떨고 다시 돌아오면 교대하듯 다음 사람이 떠났다.
저녁 내내 영어를 쓰고 이해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프랑스출신의 미국아저씨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내 엉망진창 영어에도 계속해서 기다려주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 주었다.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대화하기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같이 있던 네덜란드언니 역시 그가 'Nice Guy'라 평가했다. 다만 트럼프 강성지지자인 게 신기했다. 미국대선이 세계적으로 핫했던 주제이기는 했지만 '정치'는 어느 나라든 쉽게 꺼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의 생각을 굉장히 거침없이 말해서 놀라웠다. 외관부터 알 수 있는 이민자출신의 예술가였는데 정말 신기했다. 역시 정치성향은 외관으로도, 말하는 걸로도 모르는 것 같다. 진짜 섣불리 넘겨짚으면 안 되겠다.
정치이야기는 피하며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네덜란드 언니가 감기기운 올라온다고 '예거(Jägermeister)'라는 술을 한잔 들이켜고 침대에 누웠다. 약인줄 알았는데 술이었다. 병도 어두운 색의 약병 같고 사슴그림도 뭔가 약방(!)스러워서 진짜 약인줄 알았다. 둘이 나한테 반쯤 진심으로 약이라고 해서 더 믿었다. 옥장판 조심해야겠다. 진짜 약인지 다른 것인지 긴가민가하는 나에게 마셔보라며 조금 따라줬는데 굉장히 특이한 맛이 났다. 순간 약과 술을 섞은 액체라고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시럽 감기약 같은 맛이 났고 동시에 식도가 쓰릴정도로 알코올이 느껴졌다. 물을 들이켜는 나를 보며 네덜란드언니가 웃으며 미안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로 독일에서 감기약을 겸해서 만들어진 술이었다. 한 3년 뒤에 예거밤으로 잘 만들어 마셨다.)
단 이틀이었는데 일주일 동안 사용한 영어보다 더 많은 영어를 사용했다. 아침이 찾아오자 아쉬움과 함께 룸메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페이스북을 공유했지만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싶었다.
체코 프라하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몇 번의 환승을 거쳐야 했다. 계단과 돌길의 환장의 콜라보에 짐을 끄는 손도 점점 느려졌다. 또다시 만난 계단참에 잠시 숨을 크게 고르고 있을 때 나를 스치고 올라갔던 흑인언니 한 명이 계단을 도로 내려와 내 짐을 들었다. 꽤 무거울게 분명한데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올라 가 짐을 내려준 그는 고맙다는 말에도 고개만 끄덕이고 쿨하게 사라졌다. 정말 너무 멋있었다. 덕분에 환승길이 좀 더 편해졌다.
멋진 언니의 도움과 내 염려증의 결과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도 촉박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 생각하며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했다. 밀린 카톡에 답하며 수다 떨고 놀 때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핸드폰을 빌려달라며 말을 걸었다. 내 핸드폰 유심이 통화가 안 되는 플랜이기도 했고 한창 카톡을 하던 중이었기에 반사적으로 'NO, Sorry.'가 나갔다. 답해놓고 보니 유명한 소매치기 수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쳐다도 안 보니 아저씨는 근처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 남자는 폰을 빌려주었다! 순간 뭔가 싸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흐르고 혹시나 싶어 계속 그쪽으로 귀를 열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갑자기 독어도 영어도 아닌 말로 통화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남자에게서 멀리 이동하기 시작했고 폰 주인인 남자는 가지고 있던 무거운 짐 때문에 쫓아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무슨 깡이었는지 내 앞을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잡았다. 혹시나 아저씨가 해코지를 할까 봐 무서웠지만 반사적으로 잡은 옷을 놔줄 생각은 안 들었다. 옷자락을 잡고 안 놔주며 여기서 통화를 마치라는 내 말에 아저씨는 자꾸 바깥을 손짓하며 가야 한다 했고 내가 아저씨를 붙잡고 안 놔주는 사이 폰 주인 남자가 서둘러 다가와 이제 그만 핸드폰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둘에게 잡힌 아저씨는 결국 통화를 끊고 폰을 넘겨주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부자연스러워서 과연 통화를 걸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저씨는 괜히 쿨한 척 'Bro~'를 외쳤고 남자도 악수를 하고 어깨를 부딪치며 쿨하게 넘겼다. 저게 뭔 쇼인가 싶었지만 아저씨가 도망치듯 떠나고 난 뒤 남자가 내게 건넨 "Thank you, Ma'am."은 잊지 못할 거 같다.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버스에 앉아 생각해 보니 무슨 깡이었나 싶었지만 그 덕에 누군가를 도왔으니 꽤 보람 있는 행동이었다.
작은 소란 끝에 무사히 버스에 올라 체코 프라하로 향했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핸드폰도 충전하고 풍경구경도했다. 국경을 넘기 전에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들렸는데 아마 나는 체코를 들렸다가 나오면서 잠시 머물 것 같았다. 그쯤 해서 버스기사님들도 교대를 했는데 기존 운전했던 기사님이 내리지 않고 그대로 버스 한편에 타고 출발했다. 중간에 다시 교대하시는 건가? 생각이 들 때 시내의 한 빵집 앞에 버스가 정차하고 좌석에 앉아있던 기사님이 내리셨다. 너무 귀엽고 웃긴 상황이었다. 빵집으로 쏙 들어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조금 신나 보였다.
꽤 많이 달려왔지만 앞으로 4시간은 더 달려야 해서 잠깐 눈을 붙였다. 비몽사몽거리며 자다 깨다 풍경을 구경했다. 평안히 이어지던 풀밭은 신기하게도 어떤 지역을 딱 넘으니 같은 풀밭인데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만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버스 내부에 체코어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5분 만에 전혀 다른 세상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책의 문장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소복이 눈이 쌓이기 시작하고 차장밖으로 눈발이 흩날리는 것도 보였다. 초겨울의 건조한 날에서 한겨울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높이 쌓인 눈과 날리는 바람에 나의 옷과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프라하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가라앉고 눈은 녹기 시작했다.
육로로 국경을 건넜다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번 더 마치고 프라하에 도착했다. 리스본에서 산 내 야상은 돈값을 톡톡히 했고 나는 부지런히 캐리어를 끌어 호스텔로 향했다. 급하게 잡은 방이라 조금 비싸게 준 것도 아쉬웠지만 체코의 돈이 없어 카드로 결제한 탓에 추가 비용이 더 붙었다. 가격이 높은 건 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줄일 수 있었던 수수료는 왜 이리 아까운지 모르겠다. 영수증도 제대로 안 끊어준 호스텔 직원덕에 호구 잡힌 건가 하는 의심도 솟아올랐다. 어째서 카드를 사용하면 더 추가비용이 나오는 것인지 한국에서 온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들의 룰이 이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만 영수증이라고 준 종이가 진짜 종이에 숫자만 흘려 적은 것이라 카드수수료가 아니라 호스텔사장 용돈이 아니었나 싶어져 기분이 조금 꽁기해졌다.
기분전환도 할 겸 짐을 풀고 가볍게 장을 봐왔다. 마트구경은 사람이 적당하다는 전제하에 어느 나라든 즐겁다. 오는 길에는 양념이 묻힌 빵도 샀다. 영수증을 달라고 부탁했는데 직원이 나에게 영어를 물어봐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마 그는 이런 식으로 영어를 배우고 관광객을 상대하는듯했다. 문득 대단하다는 생각과 내가 제대로 알려준 게 맞는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단지 영수증(Receipt)이란 단어를 알려준 것뿐인데 너무 열심히 기억하려 해서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도 저렇게 뭔갈 열심히 배워본 적이 있나 싶었다.
숙소로 들어와 빵과 함께 마트에서 사 온 맥주를 꺼내 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유명하다는 코젤을 한 캔 사보았다. 포르투에서의 기네스 이후로 흑맥주는 내 취향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코젤이지만 흑맥주가 아닌 라인을 구입했다. 너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이 브랜드면 흑맥주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졌다. 다음에는 흑맥주를 시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