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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54

작은 스노우볼 속에서

by 강단화

2016.11.14 - 16

Český Krumlov, Česká republika


아침에 눈을 뜨고 부지런히 마트를 다녀왔다. 나름의 긴 여행을 준비한다고 물과 요깃거리를 구매했다. 입이 심심하면 넣어줄 젤리와 탄산도 챙기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아침을 대충 때운 뒤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역시나 나의 과한 걱정과 유럽의 고질적인 연착문화가 만나니 한참이고 정류장에 서서 차를 기다려야 했다.

캐리어와 일행을 잔뜩 가진 다른 관광객 한 명이 슬쩍 나에게 목적지를 물어봐왔다. 같은 곳을 간다는 것을 알고 언제 버스가 오는지, 그 버스를 여기서 타는 게 맞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따위를 물어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나의 목적지와 네이버에서 찾은 플랫폼 정보뿐이었다. 내 대답에 그는 뭔가 개운찮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일행과 같이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서 기다린 지 1시간이 더 지나서야 나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의 목적지는 '체스키 크룸로프'로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체코의 소도시였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자 서비스도 같이 발달했는지 아니면 그냥 체코의 버스가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3시간 동안 나를 태워줄 버스는 완벽했다.

버스의 좌석은 스페인의 야간열차보다 넓었고 좌석 앞에는 비행기에서나 보던 모니터도 달려 있었다. 손님들에게는 프리드링크가 한잔씩 주어졌기에 나는 핫초코 한잔을 받고 바로 영화관 모드로 들어갔다. 원래대로라면 멀미를 피하기 위해 잠이나 잤겠지만 막상 모니터 속 영화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영어자막이 달린 영화는 업데이트가 조금 느린 것 같았지만 다행히 내가 볼만한 걸 찾을 수 있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예전에 코믹스로 보았던 영화를 재생시켰다. <V For Vendetta>. 반절도 못 알아들었지만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다 보니 중간중간 뛰어넘으며 졸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어 자막으로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여러모로 연이 있던 작품이라 체코에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색달랐다.


영화를 하나 봤는데도 도착시간이 아직이었다. 또다시 스크롤을 내리다가 이번에는 <쇼생크탈출>을 발견했다. 바로 재생을 누르고 보고 싶은 부분으로 건너뛰었다. 평소 좋아하던 영화라 그런지 한국어 자막이 없어도 잘 이해되었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만큼만이라도 영어도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하긴 싫지만 능력은 높았으면 좋겠는 놀부심보다.


즐거운 영화감상 끝에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했다. 남들 다가는 마을 방향대신 포장도 제대로 안된 샛길을 따라 위로 걸어 나왔다. 숙소로 가는 내내 새로 산 캐리어가 도로 뿌서질까봐 불안했다. 한동안 세발캐리어로 다닌 트라우마가 있는 것인지 길을 가다 턱이나 돌밭을 지날 때는 절로 속도를 줄이게 되었다.

그렇게 머나먼 길을 헤치고 도착한 숙소는 기대이상으로 너무 좋았다! 발코니가 딸린 나만의 작은 스튜디오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넓었다. 기대를 거의 안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쾌적함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감탄이 튀어나왔다. 특히나 통창으로 이어지는 발코니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마을이 내다보이는 위치에 작게 놓인 테이블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짐을 풀고 내 임시 보금자리에 식량을 비축하러 나왔다. 프라하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작은 마트가 나를 반겨주었다. 여러모로 마트보다는 슈퍼가 어울릴듯한 가게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고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가로등이 켜질 만큼 어두웠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길목 곳곳에서 음식냄새가 올라왔고 숙소로 올라오는 골목은 짧았다. 장본 물건을 들고 걷는 내내 마치 내가 이 동네의 주민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더 머물고 싶었다.


좁고 복작거리던 메인골목


행복하게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아침부터 쿵쿵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엄청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조금 짜증이 올랐지만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라 생각했다. 아침을 차려먹고 대충 설거지까지 마치니 누군가 현관을 쿵쿵 두드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긴장하며 나가보니 뜻밖에도 집주인이 서있었다. 어제 체크인을 도와주었던 주인은 허리에 공구벨트를 차고 멋쩍게 웃고 있었다.

서툰 영어로 꺼낸 말을 들어보자니 옆집을 직접 개보수하고 있는데 화장실 쪽에 문제가 생겨 아침부터 큰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제 다 끝나가니 저녁부터는 소음이 없을 거라며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네왔다. 역시 서툰 영어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어제 들었던 생각을 실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가려는 집주인을 붙잡고 혹시 하룻밤을 더 묵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추가 예약이 없다고 하길래 바로 현금으로 방세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내 제안에 조금 놀란듯했지만 곧장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케이를 외쳤다. 집주인은 하루치 방세를 받고 이 마을과 방이 나의 마음에 들 줄 알았다고 답하며 돌아갔고 나는 이 마을은 아직 둘러보지도 못했단 말을 눌러 담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덕분에 나는 하루를 더 벌었다. 점심때를 맞추어 길을 나서니 어제저녁과 달리 환한 골목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10분 정도 골목을 따라 걸어가자 이 작은 마을에서 그나마 제일 붐비는 곳이 나왔다. 딱 봐도 관광객인듯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식당과 카페를 찾아 들어가고 작은 골목 곳곳을 누비었다. 나 역시 그들과 섞여 들어 골목들을 돌아다니다 이 작은 마을의 하이라이트인 성으로 향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이 아깝게도 내부는 미개방상태였다. 11월 1일부터 문을 닫았다는데 아쉽지도 않았다.


성은 닫혀있었지만 그 옆의 타워는 개방 중이기에 들렀다. 위로 올라간 만큼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지금은 겨울이라 조금 삭막하지만 꽃이 피고 마을에 색채들이 가득해지면 더 아름다울게 눈에 보였다. 중간중간 작은 포토스폿마다 커플들이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로에게 잔뜩 취해 주변도 못 보는 그 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타워를 내려오다 얼결에 그곳에 있는 박물관까지 코스로 돌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만족스러워진 관람이었다.


프라하에서 3시간이나 떨어져 있지만 왜 당일치기가 가능한지 이해가 되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둘러보는데 반나절까지도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까지 닫혔으니 2시간이면 마을과 타워를 다 보고도 시간이 남았다. 이런 마을에서 3박이나 하다니 정말 뭔 일인가 싶다. 그런데도 후회가 되지 않으니 정말 그 숙소가 마음에 들었구나 싶었다. 마을 옆을 가로지르는 강을 구경하며 찬찬히 길을 걸어 숙소로 올라왔다.

배를 채우고 맥주를 한 캔 들고 테라스에 앉아 야경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야경을 구경했다. 날이 추워져 금방 들어왔지만 커다란 통창덕에 여전히 풍경구경이 가능했다. 마을이 워낙 작은 덕에 마치 작은 스노우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물도, 눈도 없지만 그 풍경만은 유리돔 속 평화로운 전경과 꼭 닮아있었다.


숙소에서 보이던 야경뷰


방이 좋으니 어딜 나가고 싶단 생각이 안 들었다. 역시나 나의 천성은 집순이에 게으름뱅이다. 호화스러운 호텔방이 필요 없다. 나에게 편안한 방에서 재밌고 좋은 거 보며 뒹굴거리는 게 최고의 힐링이고 행복이다.

따뜻한 방에서 배부르게 먹고 다음 목적지를 골랐다. 미리 해야 될 예약들을 하나씩 해치우는데 영 마음에 드는 숙소가 없었다. 이곳에 와서 눈이 너무 높아져버렸다. 갑자기 독일이 왜 이리 비싸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방을 급하게 구해서인지, 체코의 물가를 맛봐서인지, 그도 아니면 성수기가 찾아온 것인지 마음에 드는 방이 없었다. 어쩌면 셋 다 이유일지도.

불만에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그래도 관성적으로 독일로 가는 표를 끊었다. 이렇게나 얼레벌레로 여행하는데 또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고 선을 그어놓아 두배로 고생을 한다.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은 이 여행을 어떻게 더 즐겨야 할지 모르겠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마치 휴양을 보낸듯했다. 딱히 무언갈 하지 않았는데 작은 마을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야경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짧고 작은 불빛들도 좋았다. 오랜만에 가져본 독방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다. 타인의 흔적 없이 나로만 가득 찬 공간을 집을 떠나온 순간에도 만들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게 바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구나.

어설프게 만든 내 방에서 하루동안 타인과 부대낌 없이 자유를 누리니 그 행복이 중첩된듯했다. 다음에도 또 이곳에 오고 싶었다. 작은 마을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다가오는 현실 따위는 잊고 침대 위에서 뒹글거리고 싶다. 계속 그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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