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 내리는 도시는
2016.11.17 - 18
Český Krumlov, Česká republika
Dresden, Deutschland
가방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며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굴러다녀 될 만큼 커다란 침대도, 작지만 소중했던 부엌도, 아침햇살이 보이는 발코니도 모두 좋았다. 숙소에 이렇게 정이든 적도 있었나 싶게 마음이 쓰였다. 지난 세 밤 동안 꾸렸던 나의 임시 둥지를 뒤로하고 얕은 돌길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인 커다란 버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핫초코를 한잔 받고 체코의 고급 버스를 즐기려 했것만 여러 가지가 내 발목을 잡았다. 우선 내 앞자리에 탄 서양인이 문제였다. 탈 때부터 요란하게 좌석을 눕혔다 당겼다 몸부림을 치더니 결국 버스 출발도 전에 조금 눕힌 상태로 의자를 고정했다. 좌석에 부착된 화면은 보였지만 트레이에 핫초코를 올려두기엔 부족해 보였다. 더군다나 의자를 제칠 때마다 내 무릎과 가방을 쳐대는 바람에 뭐라 한마디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한 말을 꺼내기엔 나도 여러모로 졸린 터라 그냥 영화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하니 잠이나 실컷 자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출발 전부터 뒷좌석에서 작게 소곤대던 말소리는 버스가 출발하자 더 크고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말소리라도 짜증이 날 텐데 한술 더 떠 언어가 한국어였다. 이렇게 모국어를 인식하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피곤함이 중첩이 되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거슬렸다. 귀마개를 끼고자 마음먹었을 때 앞 좌석이 요동치더니 서양 놈의 'Hey!'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쉬잇-!' 하는 소리도 들렸는데 놀랍게도 짜증이 났다. 뒷좌석은 조용해졌지만 앞 좌석의 그 의기양양한 뒤통수를 보자니 한대 톡! 하고 갈겨주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분명 거슬리는 소리를 없애준 건 고마운할 일인데 본인부터가 의자를 잔뜩 뒤로 당기며 뒷사람을 쳐놓고 쏘리 한마디 없는 인간이다 보니 고맙게 보이지가 않았다. '너 자신을 알라.' 평범한 버스에서 아침부터 느끼리라 기대치 못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니 버스는 나를 프라하로 데려다주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독일 드레스덴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이동했다. 가는 길에 배도 채우고 남은 체코돈도 털 겸 작은 샐러드도 하나 구매했다. 체스키크룸프에서 방값을 현금으로 내서인지 과하게 뽑았다 생각한 체코돈도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한화로 2,500원 정도 남은 돈을 갈물이해 지갑에 넣어놓고 독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플랫폼에 차가 들어오고 기사님이 차창의 목적지를 바꾸어 달았다. 짐칸으로 다가가는 나에게 들려오는 'Bitte' 한마디에 벌써 독일에 도착한듯했다. 짐을 넣고 재빨리 차에 올라 앞자리를 선점했다. 방해 없이 탁 트인 차창을 보자니 이대로 베를린까지 쭈욱 가고 싶어 졌다.
15분 정도 기다리자 버스는 사람들을 싣고 출발했다. 1시간을 조금 더 달렸을까 차가 정차하고 경찰 두엇이 차량에 올라탔다. 여권을 확인한다는 말에 주섬주섬 가방을 열어 여권을 손에 꺼내어놓았다. 내 자리까지 다가온 경찰에게 열어서 보여주자 받아가지도 않고 슬쩍 쳐다만 본다음 지나갔다. 나는 빠르게 끝났지만 두어 명의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추가적 확인을 거치고서야 다시 올라탈 수 있었다. 체코로 올 때에는 없었던 일이기에 조금 신기했지만 두 국가의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상황이긴 했다. 육로로 국경을 이동한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달려 국경을 넘어오자 이제껏 안 잡히던 버스의 와이파이가 연결되었다. 얄짤없이 체코땅에서는 와이파이마저 안 되는 게 조금 얄미웠으나 지금이라도 연결되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로 했다. 저번에 독일여행하며 사둔 유심의 요금제가 체코에서 지내는 동안 끝났기 때문에 체코땅을 벗어난 순간부터 와이파이 없는 내 스마트폰은 그저 폰모양의 카메라에 가까웠다. 물론 조금 남아있는 충전금액으로 사용할 순 있었지만 그것도 몇 mb 되지 않았기에 무조건 아껴야 했다.
올 때 보았던 눈도 그렇고 국경 근처가 제일 추운 지역인지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무와 풀들이 흔들리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숙소로 걸어가는 길이 걱정될 때쯤 바람이 잦아들고 해가 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차가운 겨울밤이었지만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꽤 아름다웠다. 도심으로 오고 가는 수많은 차량들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좀 전까지는 텅 비진 않아도 듬성듬성 보이던 차들이 모두 모여 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긴 언덕을 채우고 있는 걸 보자니 절로 은하수가 떠올랐다. 하나하나는 퇴근을 바라고 집을 바라는 사람들이겠지만 밤거리를 배경으로 모아놓고 보니 일부러 그려놓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이르게 퇴근한 태양덕에 반짝이는 야경을 구경하며 도시로 들어섰다.
버스에서 내리고 이미 깜깜한 거리를 서둘러 파워워킹으로 걸어 잡아두었던 호스텔로 찾아들어갔다. 공사 중인지 입구가 반쯤은 가려져있던 그곳은 직전의 숙소와 대비되어 더 열악해 보였다. 늦은 시간에 들어오기 때문이 위치를 제일 우선으로 두기는 했지만 와이파이도 안될 줄은 몰랐다. 투숙객 누구도 원치 않았던 데이터 디톡스다.
아늑했던 지난 독방에 비해 춥고 삐걱이는 호스텔 방은 좀 많이 실망스러웠다. 전날 잠깐의 오류라고 생각한 와이파이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건물의 맨 위층인지라 지붕 모양이 그대로 보이는 천장을 배경으로 내 입김인지 한숨인지 모를 공기들이 흝어졌다.
딱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와이파이도 안되니 누워있을 바에는 도시나 구경하자 싶었다. 비가 왔던 것인지 습기를 잔뜩 먹은 공기가 느껴졌다. 축축 늘어지는 공기에 어두운 색의 건물이 배경으로 들어가니 18세기 추리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가 반파되었던 드레스덴은 모든 것을 재건한 도시임에도 예스러운 풍경이 느껴지는 신기한 곳이었다. 폭탄을 맞아 넝마가 되었던 건물들은 다시금 벽돌을 쌓아올라 고풍스러운 성으로 변모했고 그 안에는 과거 왕족들의 사치스러운 예술품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것이라면 꼭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나 같은 인간을 꼬시고 있었다.
그래도 독일에 와서 레지덴츠궁들을 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드레스덴의 레지덴츠궁이 단연으로 고풍스러웠다. 건물차체의 분위기도 있었지만 도시의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 건물들의 비에 젖은 외벽이 그을음과 맞물려 예스러움을 더했고 흐릿한 하늘과 얕게 깔린 안개가 마치 소설 속 배경 같았다. 당장이라도 파이프를 입에 문 남자가 추리를 시작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건물 내부는 바깥의 배경보다는 좀 더 옛날로 시계를 돌려야 했다. 어느 방을 들어가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물들에 약간은 질리다는 감상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방과 방을 이어주는 복도조차 화려했다. 한동안 사치품은 감상하지 않아서 새로울 줄 알았는데 질리도록 많은 것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아연해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 보고 가자 싶어 박물관 통합권을 구매했는데 막상 돌아보다 보니 다 둘러보기가 벅차 구간권을 샀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로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술도 재료수급도 세공방법도 감이 오지 않는 정교한 세공품들을 구경했다가 온갖 동전들을 모아놓은 컬랙션을 발견했다. 동그란 금속에 각양각색으로 새겨진 숫자와 문양을 보고 있자니 절로 즐거워졌다. 화폐만큼 무형의 신뢰를 물질로 잘 표현한 매개체가 드물기도 했지만 그 신뢰가 시간이 변함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갖는 것도 흥미로웠다. 한참을 박물관 내부를 쏘아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오니 4시간이 지나있었다. 뒤에 가서는 체력이슈로 설렁설렁 보았음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이 유리된 곳에서 오전을 다 보내고 나오니 바깥에는 안개비가 날리고 있었다. 차라리 쏟아지면 관광을 포기하고 숙소로 들어갈 텐데 옷을 채 적시지도 못하는 비를 보자니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긴 아쉬웠다. 본래 드레스덴은 강변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럽의 발코니(도대체 유럽은 발코니가 몇 개인진 모르겠다.)로 불리는 강변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비가 오기 전에 그곳이나 좀 걸어보자 싶어 발을 옮겼다.
그리고 10분 만에 후회했다.
박물관에서 나올 때 비가 잠시 멈췄던 것인지 내가 강변을 걷기 시작하자마자 옷이 적기 시작했다. 점차 굵어지는 빗방울은 이제는 안개비가 아니라 부슬비가 되고 있었고 강변을 가득 채웠던 식당과 카페는 문과 천막을 닫고 빗물을 피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우산을 파는 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옷이 다 젖기 전에 이쯤 보면 많이 보았다 생각하고 숙소로 발을 돌렸다. 드레스덴은 비의 도시로 기억될 거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자 남자애 둘이 나를 맞이했다. 그 풍경은 내게 좀 많이 낯선 모습이라 순간 방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독일은 보호자 없는 청소년의 공용숙소 이용을 금지하고 있었고 남자애 둘은 딱 청소년을 넘긴 나보다도 어려 보였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애들의 학교인지 학원인지 모를 곳에서 같이 놀러 왔고 그중 B는 관광대신 방을 선택한 듯싶었다. 그리고 A는 혼자 숙박하지 못하는 B를 위해 본인이 보호자겸 얼굴 마담을 자처한 듯싶었다.
처음에는 둘 다 방을 예약한 줄 알았는데 방에 준비된 침대가 한 개였던 것과 B가 안 되는 영어로 숨어 들어왔다고 한 말을 보았을 때는 A가 예약을 하고 나중에 B가 몰래 들어온듯한 느낌이었다. 호스텔자체가 워낙 허술하게 관리되고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보니 가능했던 꼼수 같았다.
두 남자애의 인종은 달랐지만 둘 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랬기에 우리는 손짓발짓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B는 그게 답답했는지 핸드폰 자판에 언어를 추가해 번역기를 켜주었는데 문제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다운로드하여 켜주는 바람에 무용지물이었다. B는 조금 더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비를 맞은 몸은 점점 무거워져 왔다. 결국 나는 어색한 웃음과 씻고 온다는 말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 방에는 나와 남자애 둘 말고도 서양인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역시 20대 초반의 재밌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얘기치 못하게 생긴 룸메이트에 조금 불편함을 들어내기는 했지만 나에게 이런저런 여행지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나와는 반대로 이제 체코로 향한다는 그는 거의 내 몸만 한 백팩을 지고 여행 중이었는데 절로 저게 진짜 '배낭여행'이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거의 내 몸통만 한 가방에는 옷부터 작은 가방, 책, 드라이기까지 알차게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와 신나게 수다를 떨며 다음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데이터를 탈탈 털어 썼다. 이제 잔여 금액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다음 도시에서는 핸드폰 먼저 해결을 봐야 할 듯싶었다.
반쯤 곯아떨어진 남자애들에게도 굿 나잇 인사를 전하고 내일 일찍 일어나 떠난다는 룸메이트에게 깨워달라는 반쯤 진심 섞인 이야기를 건네며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싫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