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이는 대화와 싹트는 생각 속에서
2016.11.19 - 20
Stuttgart, Deutschland
해도 뜨기 전에 룸메이트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다만 축축 처지는 몸에 눈을 뜨지는 못하고 그저 나가는구나. 생각만 할 수 있었다. 나갈 때 깨워달라는 어제의 내 농담 섞인 당부가 마음에 걸렸는지 룸메는 나의 침대 주변을 잠깐 서성이다가 방을 나섰다. 깨워달라 하긴 했는데 시간이 너무 이르다 보니 포기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기 전에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무거운 몸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조금 많이 아쉬웠다.
룸메가 방을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더 자고 일어났다. 그래도 여전히 8시를 가리키는 시계에 도대체 그 친구는 몇 시에 나간 것일까 싶어졌다. 대충 씻고 근처 마트로 향해 간단히 먹을 빵과 물을 구매하고 나왔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5백 원짜리 빵은 생각보다 든든했고 맛있었다. 여행을 하며 더 줄어든 내 위장 탓도 있긴 하겠지만 덕분에 값싸고 편리한 한 끼 식사가 가능했다.
마트를 다녀오는 사이 남자애들이 나갔는지 방이 비워져 있었다. 덕분에 편하게 짐을 정리하고 숙소를 나섰다. 드레스덴은 도시도 숙소도 다 꿈결 같았다. 엄청 몽환적이거나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뜬금없이 장면이 전환되는 기분이었다. 화려한 박물관을 보고 나오면 비가 내리는 강물이 보였고 굴다리를 건너면 공사 중인 호텔방이 보였다. 그러고 또 정신을 차려보면 14살쯤 되는 남자애가 보여주는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 덕에 내게 드레스덴은 기묘하고 연관성이 없고 소설 같았던 도시였다.
다음 목적지는 독일 남부의 슈투트가르트였다.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어쩌다 보니 다음 도시가 되었다. 독일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가봐야 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차도 미술도 잘 모르는 내겐 큰 매리트가 없어 밀어둔 도시기도했다. 그나마 그 도시에서 내가 보고 싶은 건 한국인 건축가가 참여했다는 도서관이 전부였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밀어두다가 가장 비효율적인 루트로 가장 불편하게 향하게 되었다.
내가 있는 드레스덴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는 버스로 8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동안 들렸던 굵직한 도시들을 다 거쳐가는 루트였다. 몸만 한 짐을 이끌고 전광판도 안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아무런 표지판도 안내도 없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다른 사람들이 섞여 앉아 각자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줄을 맞추어 서있던 사람들이 기다림이 길어지자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의자 비슷한 것에 자리를 잡았기에 비교적 편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이럴 때는 핸드폰으로 검색이라도 하면 딱 좋을 텐데 전날 데이터를 털어 여행계획을 짰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멀뚱멀뚱 사람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는 행위였는데 꽤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개중 몇몇은 일행과 수다를 떨거나 옆사람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내 앞에 여자 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비니를 쓴 여자는 독일에 유학을 온 학생인듯했고 피어싱이 화려했던 여자는 국적은 모르겠지만 독일에 사는 사람 같았다. 둘은 영어로 소통했기에 그나마 거기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였다.
(편의상 비니를 쓴 여자는 B로 다른 여자는 A로 적겠다.) 둘은 각자의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림에 지친 B가 먼저 말을 걸었다. 잠깐의 의미 없는 말과 연착되는 버스에 대한 불평이 지나갔고 서로의 일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B는 친구들을 뮌헨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버스가 더 연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A는 여자친구가 베를린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얼른 버스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순간 B가 당황한듯한 몸짓이 보였다. 곧이어 작게 들린 'Oh..' 소리와 B가 조심스레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너의 여자친구는 베를린에 사는 거야?'. A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여자친구가 함께 사는 걸 원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순간 버스정류장에서 듣기에는 너무 큰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졌다. 심지어 나는 그들의 대화에 참여자도 아니었다. 절로 시야가 돌아가고 더 이상 들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어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 다행히 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기사아저씨는 열심히 버스 앞의 표지판을 바꾸고 목적지를 물어봐오는 사람들에게 편명을 외쳐주었다. 짐칸을 열어주기에 다가가자 표를 확인하고 짐을 넣어야 하는 칸을 말해주었다.
정신없이 짐을 싣고 차에 타려는 사람과 목적지를 확인하는 사람과 섞이고 그 모든 걸 뚫고 자리에 앉자 숨이 돌아왔다. 창가로 보이는 터미널에 아까의 여자 둘이 벽에 기대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B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고 A는 열심히 무언갈 말하고 있었다. 둘은 평범한 친구사이처럼 보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할 광경이었다. 처음 보는 타인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 아주 자연스럽게 전하고 또 그 주제에 관해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놀라웠고 신기했으며 조금 부러웠다.
가장 열악한 자가 편안함을 느낄 때야 말로 그곳이 진정으로 좋은 장소라 생각한다. 나는 A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 딱 하나는 알 수 있었다. A는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완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개된 장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 말하는 것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고 어떠한 위험도 느끼지 않았다. 그 편안함이 조금 많이 부러워졌다.
살면서 몇 번의 커밍아웃을 겪었다. 때론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서였고 때론 이미 짐작하고 있던 친구에게서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될 때부터 그들의 애인을 함께 소개받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도 나는 나의 태도와 무지가 그들에게 상처로 남을까 두렵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의 고민과 고통이 더 크고 두려울 것을 알기에 그저 말해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나의 친구들을 '불편해'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사람인 이상 모든 타인들을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제발 티를 내지 마시라. 그들은 뿔 달린 악마가 아닌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고통을 느끼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이다. 서로 간의 예의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문화충격과 생각할 거리가 많이 쌓였지만 버스는 착실히 아래로 달려 나갔다. 2시간쯤 달렸을 즈음 비가 내리는 국경 근처 도로에서 경찰이 버스를 세웠다. 실제로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닌데 이게 뭔가 싶었지만 차가 멈춘 김에 배나 채우자 싶었다. 아침에 샀던 빵을 꺼내 먹는데 이제껏 걸렸던 그 어떤 검문보다도 더 오래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몇몇의 사람들이 불려내려가고 버스는 한참을 서있었다.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피곤해 보이는 탑승객과 기사가 버스에 다시 오르고 출발할 수 있었다.
무려 8시간이나 달리는 장기간인 노선덕에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음식과 물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사악한 가격에 곱게 손에 쥐었던 콜라병을 내려놓았다. 500ml 한 병에 3유로를 태울만큼 콜라가 급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 마트에서 구매한 빵과 물을 합쳐도 3유로가 안되었었다.
가지고 있는 물과 간식으로 대충 허기를 달래고 잠을 자니 어느새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들어가 짐을 푸니 밀린 피로가 한 번에 쏟아 드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냥 자기에는 조금 아쉬워 호스텔 바에서 맥주를 한병 깠다. 숙박객에게 제공되는 퍼스트 드링크 쿠폰을 이용하여 단돈 1유로로 얻은 행복이었다. 따끈한 물로 샤워한 몸은 노곤노곤했고 적당한 알코올이 들어가니 절로 몸이 풀어졌다. 어제의 숙소와는 비교도 안되게 팡팡 잘 돌아가는 라디에이터에 공기가 따뜻했다. 양치하고 숙소 베개에 머리를 뉘니 바로 꿈나라다.
따뜻하고 어두운 방에서 긴장을 놓으니 그대로 12시간 동안 잠에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은 이미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커튼이 짙게 쳐진 방은 아직도 자정 같았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라디에이터 덕에 약간의 숨 막힘마저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려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왔다. 시내를 구경하러 움직이다 마트를 먼저 들렸다. 전날 휴게소의 악몽과는 다르게 합리적인 가격표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1.5L 물과 콜라를 양손에 끼고 오레오과자도 하나 집어 들었다. 3.57이 찍힌 영수증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원래도 물먹는 하마였지만 여기와 서는 물과 콜라 먹는 하마로 진화한 느낌이었다. 엄마아빠한테는 비밀이었다.
아직 12월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벌써 크리스마스 마켓준비가 한창이었다. 유럽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상점들이 문을 닫고 다들 가족과 함께하는 대신 한 달 정도 마켓을 화려하게 연다고 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마켓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미리 설치된 조형물들이 반짝였고 바쁘게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이미 주말장이 섰고 가족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수선한 느낌보다는 이제 시작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먹을걸 손에 쥐고 풍경을 구경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에 미묘한 향수가 느껴졌다. 햇살은 비췄지만 찬 바람이 살랑였다. 약간은 더운 듯 쌀쌀한 느낌이 독일에 도착한 첫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 달 전인데 아득하기도, 엊그제 같기도 한다.
잠깐 사색에 젖어보려 하는데 한 무리의 철부지들이 도와주지를 않는다.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애들이 저들끼리 무엇에 신났는지 왁자지껄 떠들며 바보 같은 짓을 시작했다. 저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조금 점잖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액면가보다 어린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한국이든 외국이든 철이 덜든 남자라는 존재들은 보기만 해도 피곤해진다.
소란스러움을 피해 산책을 하다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 짐에 따라 기온이 뚝뚝 떨어지길래 서둘러 숙소로 들어왔다. 오늘 산 오레오를 먹으며 일기를 정리하다가 문득 요 며칠 먹은 식사가 너무 부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밀가루도 좋긴 하지만 영양분을 좀 채워야겠다 싶어졌다. 잦은 이동을 핑계로 대충 식사를 때우다 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저녁은 기력보충으로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계획은 계획일 뿐 결국 과일로 저녁을 때웠다. 그래도 비타민도 꽤 좋은 영양분이니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