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던 조명이 켜지면
2016.11.21
Stuttgart, Deutschland
어젯밤에 잠들기 직전쯤에 말을 튼 룸메이트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었었다. 각각 터키와 일본에서 온 H와 Y는 내일이면 체크아웃인 친구들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남은 시간이 오늘 밤 밖에 없다며 열심히 수다꽃을 피웠는데 주로 해외살이나 여행, 타국의 문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간에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말하다가 터키친구인 H가 중국식 별자리(Chinese zodiac)인 '띠'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 3명이 머리를 맞대고 연도를 카운팅 하기도 했었다. 검색 한방에 해결되는 심플한 문제였는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우리 셋은 밤이 늦도록 수다를 떨어댔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떠들고 아침 늦게 눈을 뜬 우리는 H가 기차로 떠나기 전에 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Y는 짐을 정리하느라 조금 늦게 합류하기로하고 나와 H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의 커피를 마시며 아침햇살을 만끽했다. 어젯밤과는 달리 둘이서만 나누는 대화는 좀 더 차분했고 무거웠다. 터키가 고국이지만 고국으로 가기 무섭다는 H는 지금은 영국에서 공부 중인 유학생신분이었다.
며칠 전 흘깃 본 CNN뉴스에서 터키의 정치상황과 반정부 시위로 불안한 치안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저 '세계뉴스'라고 보고 지나친 이야기가 H에게는 현실이고 헤쳐나가야 할 사건이었다. 그 뉴스를 볼 때 가볍게 지나간 태도가 미안해졌다. 전날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 들었던 내용이 떠올라 H에게 조심스레 정치상황 때문에 영국에 더 머물고 싶은 거냐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다 동시에 저었다.
"내가 고국으로 가기 두려운 것은 내가 바꾸기 힘든 현실을 봐야 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엉망인 나라라도 난 터키에서 태어났고 나의 가족들은 거기 있어. 거긴 내 집이야."
섣부른 위로를 서툰 영어로 전하다가 오해가 생길까 겁이 났다. 그저 한국도 비슷한 역사가 있다 말해주는 것 밖에는 다른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H는 내 엉망인 영어로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듣고 웃어주었다. Y가 오면서 우리의 대화를 멈췄지만 마지막에 H가 던지듯 내뱉은 한 문장이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Winter is coming". 미국의 유명한 드라마 대사처럼 겨울이 오고 있었다.
H를 배웅하고 Y와 나는 함께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저녁버스를 타고 떠나는 Y는 버스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기에 나는 가고 싶었던 도서관을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Y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슈투트가르트를 찾아볼 때부터 유일하다 말해도 좋을 정도의 목적지였기에 기대가 있었다. 한국인 건축가가 참여했다는 도서관 건물은 크고 하얗고 큐브 같으며 겉면 한쪽에 "도서관"이라는 한글이 적혀있었다. 타국에서 보는 한글은 언제나 새롭고 신기했다.
조심스레 입장한 도서관 내부는 따스했고 조용했다 입구에서 들리는 작은 물방울소리가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지만 거슬리기는커녕 오히려 방문을 환영하는 풍경소리 같아서 듣기 좋았다. 건물은 특이하게도 가운데를 비워두고 층을 쌓았는데 그 덕분인지 실내임에도 개방감이 엄청났다. 그럼에도 책장뒤에 개인공간을 두어 독립된 느낌을 주었는데 그 센스가 절묘하고 딱 내 취향이라 하루종일이고 이곳에 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문득 Y에게 같이 오자고 한 것이 후회되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일행을 끌고 오기에 이곳은 너무 머무르기 좋은 장소였다. 사람들이 내는 백색소음과 여기저기서 들이치는 빛이 최소 독서에서 최대 낮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많은 채광을 견디고 있는 책들이 조금 가여워졌지만 이 책장들 사이에 앉아 한숨 잠든다면 완벽한 낮잠을 잘 수 있을 거 같은 분위기였다.
혼자 왔다면 햇살 잘 드는 파란 소파 위에 앉아 안 되는 영어로 책을 읽다 잠들었겠지만 일행이 있으니 모든 것이 요원했다. 그래도 아쉬움을 남겨야 더 그리운 법이다 스스로를 달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을 나와 어제 보았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했다. 시간이 안 맞아 마켓을 못 보고 간다고 아쉬워했던 Y를 그나마 달래줄 만한 풍경이었다. 그는 계속 정식개장이 아니라는 것에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그만 보자는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반응이었지만 딱히 이동하자는 제안이나 무언갈 먹자는 말도 없었기에 나도 신경을 끄고 구경을 했다.
예쁘기는 하지만 아직은 한산한 통로와 반쯤은 비어있는 가판대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우리는 Y가 전날 찾아둔 교회를 보러 이동하기로 했다. 교회는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고 Y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 했다.
다만 간과한 것은 독일은 언제나 공사를 진행 중이고 우리는 초행길을 걷는 관광객이라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들었는지 결국 우리는 길을 잃었다. 빙 둘러 걸어 내려온 우회로 덕에 우리는 교회에서도 마켓에서도 멀어진 엉뚱한 지점에 덩그러니 놓였다.
다시 찾아가면 Y의 시간이 촉박해질 것 같았기에 우리는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조금 눈치를 보게 되어서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둘이 같이 실수를 했을 때 조금 더 상대방을 신경 쓰는 사람이 더 큰 죄책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그리고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더 상대방을 신경 쓰기 마련이었다. 떠나야 하는 Y는 자기 대신 내가 교회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 말했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건 아마 Y의 은은한 태도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이곳에 와서 룸메이트들에게 여러모로 짧은 만남에 많은 것들을 배웠다.
Y는 숙소에서 짐을 찾고 떠났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지하철 티켓은 안 사냐는 내 물음에 자신은 한 번도 검사에 걸린 적 없고 여기서 꾸준히 티켓을 사는 건 돈낭비(!)라는 명언을 날려주고 간 그는 내가 여행 중 만난 사람들 중 제일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표정과 태도로 호불호를 너무 명확히 보이던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 떠난 두 룸메이트들과 달리 나는 아침에 숙소를 연장한 덕분에 이 도시에서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Yㅏ 말한 교회는 그 많은 시간 중에 찾아가도 되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냥 오늘 교회를 해치우고 싶었다. 대충 가방을 싸고 혼자 해 진 다음부터 다니지 않는 불문율도 깨고 숙소를 나왔다. 착실하게 돈낭비한 지하철티켓을 손에 쥔 건 덤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무리의 시위대와 마주했다. 거대한 현수막을 손에 쥔 채 행진하고 깃발과 피켓들이 뒤를 따랐다. 학생으로 보이는 꽤 많은 무리들이 도로 한쪽을 막고 있었기에 무엇 때문에 시위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시위대를 지켜보는 경찰에게 다다가 저들이 무엇을 위해 행진하는 거냐고 묻자 "시위(Demonstration)"라는 말이 돌아왔다. 흠. 내 영어가 짧은 탓에 '무엇을 위해 시위하냐'가 '저게 무엇이냐로 전달된듯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뭘 그런 걸 물어보냔 얼굴로 이번에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외치는 경찰분께 웃어주고 재빨리 튀었다. 아직 영어는 내게 너무 어려운 언어다.
약간의 고비 끝에 도착한 교회를 예뻤다. 비록 아무도 없고 규모도 조금 작았지만 연못 위에 비친 야경은 볼만했다. 어떻게 찍어도 영 별로인 사진실력으로 야경을 담고 Y에게 전송했다. 고맙다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그의 떨떠름한 얼굴이 액정너머로 비춰 보이는 듯했다.
작은 연못도 나름 물가라고 쌀쌀하게 느껴졌다. 사진에 안 담기는 풍경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잠깐 인적 없는 골목을 나오니 술집과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사이로 술과 담배냄새가 흘러나왔다. 여행 초기에는 내가 소심하고 낯을 가려서 저런 걸 못해봐기에 소음과 번잡함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두 달 사이 왁자지껄한 사람 무리에도 속해보았고 한국에서는 냄새도 안 맡아본 높은 도수의 술도 마셔봤지만 난 천성적으로 번잡함을 안 좋아하는 사람 같다. 물론 좋은 사람과의 즐거운 시간을 좋아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함께 있는 소란스러움은 달에 한 번이면 내게 충분한듯했다.
숙소로 가기 위해 낮에 보았던 크리스마스 마켓을 통과하니 그새 조명들이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희미했던 빛들이 선명해지고 노랗고 하얀빛들이 나무집 위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바로 지나가려던 것을 마음을 바꿔 괜히 한 바퀴 마켓을 돌았다. 고소하게 볶아지는 견과류 냄새사이로 끓여지는 뱅쇼에서 증발항 알코올과 계피향이 섞여 들었다. 비슷하게 소란스럽고 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내 취향은 술집의 번잡함보단 야외의 분주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