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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46

시나몬가루 조금, 레몬사탕 하나, 문어 많이

by 강단화

2016.10.28

Lisboa, Portugal

Porto, Portugal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어제는 늦잠으로 놓친 조식을 오늘은 잘도 찾아먹었다. 다만 첫 번째 일정을 위해 가볍게 요기만 때웠다. 짐을 대충 싸놓고 호다닥 호스텔을 나왔다. 며칠간 '내일-'을 연발하며 미뤄둔 일을 해치울 차례였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한국인들에게 리스본 에그타르트 3대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 나왔다. 숙소에서 거리가 가까워 자꾸만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결국 마지막날에서야 방문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에그타르트를 '나타'라고 불렀는데 기존에 내가 먹어본 한국식 에그타르트와는 확실히 달랐다.


빵과 쿠키 그 어드메의 타르트지와는 달리 이곳의 타르트지는 페스츄리로 이루어졌고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페스츄리 사이로 달고 부드러운 계란크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조금은 달다 싶은 맛이 계란비린내를 숨기고 부드러움을 극대화시켰다.

혹시나 입맛에 안 맞을까 고민하면서도 6개짜리 세트를 산 선택이 후회되지 않는 맛이었다. 조금 덜 달면 더 좋았겠지만 커피와 마신다면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본에서 먹은 다른 나타와 비교했을 때 이곳이 엄청 더 맛있다는 감상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유리장 가득 채워진 나타들을 보면 엄청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역에서 가까워서 오며 가며 한번 들려볼 만한 맛이었다.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리스본에서 맛본 빵들은 다 맛있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페스츄리반죽의 에그타르트를 많이 찾을 수 있다. 맛의 수준이 매년 올라가서 기쁜데 가격 역시 올라가고 있어 조금 슬프다.)


20161028_104340.jpg 챙겨주는 시나몬을 뿌려 먹으면 더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수확물을 가지고 위풍당당 호스텔로 돌아왔다. 체크아웃이 늦은 호스텔이었기에 창밖을 구경하며 에그타르트를 하나 꺼내 먹었다. 챙겨준 시나몬을 뿌리고 한입 크게 배어물자 계란 비린내에 조금 물릴듯한 입맛이 다시 돌아왔다.

이른 브런치를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대충 싸둔 짐을 꼼꼼히 점검하고 먹다 남은 에그타르트도 잘 포장해 가방에 넣었다. 부디 하루사이에 상하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또다시 짐을 이고 지고 돌길을 걸었다. 이제는 진짜 캐리어의 바퀴가 못 버티겠는지 한 발자국 갈 때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내 몸만 한 짐으로 힘든 와중에 어제 사놓은 24시간 교통권이 아직도 유효한지라 바로 지하철에 탈 수 있었다. 어제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으면 되려 억울할뻔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잠깐의 기다림을 거치고 드디어 버스에 탑승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몸이 멀미와 만나 수면을 호소했다. 나는 기꺼이 버스 창문에 머리를 박고 짧은 취침을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차체덕이지 멀미를 피하고 싶은 본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버스에서는 잠이 잘 온다.


3시간 반의 여정 끝에 드디어 포르투에 도착했다. 조금은 서늘해진 공기가 춥다고 느끼기도 전에 나의 캐리어가 결국 파업을 선언했다. 댕강 난 바퀴 한 짝과 덜렁 남겨진 나는 결국 3발의 캐리어와의 등정을 시작했다.


리스본에서 예약한 포르투의 숙소는 1박에 19 유료라는 예약 당시기준 저렴한 가격과 조식포함이라는 매리트로 선택한 곳이었다. 주요 도심에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새로 오픈하는 곳이라 청결도도 괜찮은듯해 꽤 마음에 드는 곳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포르투가 어마무시한 언덕을 품고 있는 도시란 것을 놓치고 말았다.


포르투에는 마치 서울에 있는 가로수의 수만큼 언덕이 존재했다. 이토록 끊임없이 올라가면 고산병이 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정점을 찍으면 도로 내려가고, 다시 얼마못가 올라가는 동산이 눈에 보이는 이 도시는 정말 신기한 언덕의 마을이었다.

더군다나 버스가 도착한 정류장이 나의 예상과는 달리 도심의 끝 쪽에 위치해 있는지라 나의 앞길이 아득해졌다. 구글맵으로 찍어보니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약 50분 정도의 루트가 나왔다. 트램으로는 30분 정도가 나왔지만 공사 중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배차가 느린 것인지 40분 후에나 다음 차량이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벤치도 그늘막도 없는 길바닥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40분을 기다릴 바에는 조금이라도 걷다가 트램을 타는 게 났겠다 싶어 언덕을 올랐다. 나아간 지 10분 만에 내 선택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미 시작한 길, 다음 정류소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바퀴가 빠진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자니 힘이 배로 들었다.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은 어느새 땀을 식혀주는 선풍기처럼 느껴졌고 약간은 얇은가 싶었던 옷은 더워서 벗어버리고만 싶어졌다.


분명 딱 세 정거장만 가고 트램을 탈 생각이었는데 다음 정류장이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예상보다 한참을 걸어서야 보인 트램 정류장에서는 또다시 다음 차가 30분 뒤라고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짧은 계산이 지나가고 결국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때론 이른 포기가 심신에 도움이 된다는 걸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결국 나는 1시간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몸은 땀으로 샤워를 한듯했고 가지고 온 생수는 이미 바닥을 보였다. 이게 무슨 극기 훈련인가 싶었지만 빌어먹을 트램은 내가 숙소로 오는 내내 단 한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3 지점부터 나를 도와주는 일행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유독 힘든 동산을 오르던 도중 잠시 길을 찾을 겸 그늘밑에 멈춰 섰었다. 지친 숨도 돌리고 길도 체크하고 있을 때 불쑥 남자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까지 가? 도와줄까?"

"음... 아니. 꽤 멀리 가야 해서 괜찮아."

"얼마나 멀어? 그러면 더 도와줘야지."


까만 옷을 입고 눈을 반짝이는 게 부담스러워 내가 가야 할 거리이름을 불러주었다. 자신이 길을 안다면서 내 짐을 끄는 모습에 서둘러 따라붙어 내 캐리어를 잡았다.


"내 캐리어가 고장 나서 더 무거워."

"알아. 너 밑에서 올라오는 거 봤어"


나를 보고 있었다는 말에 조금 기분이 찜찜해졌지만 만약 나라도 누가 캐리어를 밀고 언덕을 오르고 있으면 절로 시선이 갈 것 같았다. 남자는 영어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우리의 문답은 대게 단어의 나열로 이루어졌다.


남자는 자신이 근처교회에서 산다고 말했고 내가 'Priest(신부)'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교회에 사는 사람이라곤 신부, 수녀, 목사밖에 모르던 나였기에, 그리고 영어로 아는 것은 오로지 Priest였기에. 아마 나는 모르는 또 다른 직책(?)이 있겠거니 싶었다. 남자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 보인 점도 한몫했다.


학생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젓고 여행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지 않냐는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기는 힘이 세기 때문에 괜찮다고 짐을 끌었다. 남자는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힘이 세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엄청나게 든든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캐리어 옆 손잡이를 들어 무게를 맞추고 남자가 캐리어를 끌며 언덕을 올랐다.


길을 가는 내내 연신 내뱉어지는 나의 '땡큐'소리에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배운 대로 행동할 뿐이라며 그는 자신의 선행을 그의 신의 가르침으로 돌렸다. 아마 내 생을 통틀어 내가 만난 기독교인중 제일 기독교의 배움을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진짜 기독교인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숙소 앞에 도착해서 남자는 쿨하게 캐리어를 넘겨주었다. 혹시나 돈이라도 줘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내가 민망해지게 남자는 내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도와줬는데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간식으로 챙겨두었던 사탕을 꺼내 들었다. 손으로 건네는 게 너무 작은 것이라 민망해졌지만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사탕을 받아갔다. 대신 숙소의 벨을 눌러주고 잘 가라 인사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첫 시작부터 쉽지 않았지만 이 도시가 좋아질 거 같았다.


숙소로 들어가자 친절한 직원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2층 룸으로 올라가면 된다며 내 짐을 번쩍 드는 직원덕에 편히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이 도시의 남자들은 배려가 좋구나-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대충 샤워를 마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환하게 웃으며 조심히 다녀오란 직원의 배웅을 뒤로하고 E 언니를 만나러 시내 중심가로 향했다.

숙소에서 번화가로 들어 갈수록 기다란 망토를 입은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리포터> 속 학생 같은 모습에 절로 눈길이 갔다. 핼러윈 코스프레 같았지만 포르투 대학의 교복이었다. 실제로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K. 롤링은 포르투에 머물며 작품을 집필했던 시기가 있기에 포르투에는 <해리포터>의 모티브로 얘기되는 점이 꽤 많았다.


역시나 E언니가 찾아둔 식당으로 향해 음식을 주문했다. 포르투에서 꼭 먹어야 한다고 추천받은 문어밥은 그저 그랬지만 샹그리아는 맛있었다. 후식으로 시킨 망고도 달달해서 나쁘지 않았다. 언니는 이곳보다는 다른 곳의 문어밥이 더 맛있을 거라며 같이 가지는 못하지만 다른 동행을 구해서라도 꼭 가보라며 내게 식당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행하며 알게 된 좋은 것은 다 공유해 주려는 그 열정이 기꺼웠다.


20161028_202611.jpg 언니와의 마지막 식사


우리는 약간의 와인냄새를 풍기며 식당을 나왔고 강을 건너며 야경을 구경했다. 다리를 걷는 내내 우리는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마 이제 언니와 헤어지면 한국에 가서 시간을 따로 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이후로는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 이제껏 '잘 가'라고 얘기하고 며칠 뒤에 다시 보다가 진짜로 '잘 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넬 때가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더 웃고 더 걸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었고 나는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는 말을 믿었다. 포르투에서의 처음이자 언니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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