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부부는 나중에야 그것을 알았다. 그래도 올해는 며칠 지나지 않은 기념일 당일 오후에 알아차렸다.
"어? 우리 결혼기념일이 며칠이었지? 오늘인가?"
"오늘이 00일인가? 오늘이네!"
"이거 남편이 올해도 기념일 까먹네"
"허헛, 누가 할 소리"
결혼기념일을 9번째 맞는 동안 웬만하면 내가 먼저 알아차리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아내였다.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결혼기념일을 까먹을 수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좀 다르다. 연애 땐 안 그러다가 결혼하고 나서 변했다면 비난받을 만한 일이겠으나, 우리는 연애할 때부터 서로의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았다. 그 점에선 우리는 천생연분이었던 셈. 둘이 잘 지내는 게 중요하지 기념일 챙기는 게 뭐가 대수냐는 생각에선 우리 둘은 한마음이었다. 그 흔한 100일이니, 300일이니, 1년이니, 1000일이니 하는 것들도 없었다.
신혼집이었던 노량진 반지하 방에서 첫째 아이 돌을 맞아 생일 케이크로 축하했다.
서로의 생일에도 축하 인사를 건네는 정도였지, 선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예 없는 거 같기도 하지만 정확하진 않아서 '별로'라는 단서를 달았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돌 정도를 챙겼다. 1년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사서 생일 축하를 했다. 그 뒤로는 없었다.
그러다 생일을 챙기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이것도 아이들 때문…. 아니 아이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 초등학교에 가면서 어느덧 생일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다. 유치원에서 한 달에 한 번 생일을 맞은 아이들을 위해 생일 케이크와 상을 차리고 선물을 주는 월례 행사를 했다. 태권도장에서도 한 번씩 신청자에 한해 생일 파티를 열었다. 아이들은 생일이 특별한 날, 누군가에게 축하받는 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받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이 못지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며 생일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다.
첫째와 둘째가 날짜 개념을 탑재하게 되면서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나와 아내에게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의 생일을 물어보며 생일 선물 포장하는 맛을 들이게 됐다. 선물이라고 해 봐야 본인이 쓰던 색종이류를 이리저리 오리고 붙여서 만든 종잇조각들에 불과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아빠 엄마 생일이 몇 달 전부터 싸놓으면서 기쁨을 만끽했다. 이쯤 되니 우리 부부는 생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식구의 생일을 챙기게 됐다.
그러나 그 효과가 아직 결혼기념일까진 미치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직 결혼기념일에 대해선 흐릿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아이들이 좀 더 커서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 특별하다는 것도 알게 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어딘가에서 결혼기념일에 대해 접할 테고, 그것을 축하하는 문화를 알게 되면 우리 부부에게 그 의미를 물어오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결혼기념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챙기게 되겠지.
그러나,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끌려 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기회가 마침 왔다. 내년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0년이다. 10주년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 그저 지나칠 수는 없다. 이 기회에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할 테다. 너희가 주도하는 기념일에 더는 끌려가지 않을 테다. 남편으로서의 존재감을 10주년에서만큼은 보여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