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살살 녹이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쪽에 정리했던 책을 다시 꺼냈다. 《어제 뭐 먹었어?》, 여러 번 읽었지만 정주행 한다. 시로와 켄지, 변호사와 미용사다.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처럼 사는 남남커플이며 만화의 주인공이다. 여자보다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자라는 점이 내가 아는 남자와 다르다. 시로는 퇴근 후 여러 가지 요리 재료를 할인 가격으로 사 와서 식사를 만든다. 메뉴도 요리법도 다양하다. 전업주부 입장에서 읽어도 신기한 요리법이 주렁주렁 나온다. 특별하거나 어려운 요리법이 아니라는 점이 여타 요리 책 보다 마음을 잡아당긴다. 현재 18권까지 나왔고 나는 18권까지 갖고 있다. 그중 4권에 나오는 소송채를 넣은 닭고기 달걀죽, 달걀말이, 시금치두부깨무침은 따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들이 매일매일 먹는 일상 요리에 침이 고인다.
매일 밥을 짓는 일은 힘들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 먹을 일을 걱정한다. 태어나 가장 오래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한 일이 밥 짓는 일이다. 감기를 앓은 날에도 모더나 접종을 한 날에도 어김없이 밥솥에 밥을 안쳤다. 벌써 수십 년째 하는 일이 되었다. 경력이 쌓였다고 잘하거나 시간이 덜 걸리지는 않는다. 다만 요령이 생겨 밥이 되는 동안 다른 일을 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장보는 일이 조금 즐거워졌다는 차이는 있다.
시로는 자연스럽게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든다. 요리법을 따로 배웠다고 하는 내용은 책에 없다. 그저 켄지와 같이 하는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퇴근길에 전단지를 보고 할인하는 재료를 산다. 시로가 만드는 음식은 차분하고 색이 곱다. 눈으로 먹는다. 감기로 혀가 둔해져 싱거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먹어도 맛이 제대로 느껴질 것 같다. 시로의 음식에는 케냐 레드마운틴 더치커피가 어울린다. 차가운 물로 천천히 내린 커피라 부드럽다. 온화하지만 굽히지 않는 굳건함이 느껴진다. 풍성한 과일향이 긴 여운을 그린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향기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오늘의 커피는 매일 먹는 밥과 잘 어울린다. 더 갖겠다고 손해 보는 일은 싫다며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나와 달리 퍼주는 일에 마음을 담는 H에게 주고 싶은 커피다. 미간이 좁아지고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고 늘 하던 일에서 허둥지둥 헤맬 때 같이 마셔보자. 작은 걱정 한 줌과 소소한 불만 한 홉이 커다란 불행으로 번지는 걸 막아줄 것이다. 희망차게 시작의 문을 열었으나 끝맺음을 하지 못한 숱한 나날들이 패배감이라는 이름으로 주눅이라는 소심함으로 귀결될 때 밥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도, 밥 먹고 커피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