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예멘 하라즈 오렌지

by 만델링

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곳이 있다.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숲이 있는 곳이다. 소박하고 한적한 절에 발을 들이면 다른 세상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용히 미끄러지듯 숨어든 기분이 드는 곳이다. 산만한 마음과 묵직한 몸이 풀어진다. 전두엽의 피곤함이 풍경 소리에 매달려 사라진다. 실적도 없이 너무 열심히 사는 나는 삶이 각박하다 느끼면 절집으로 간다. 불이문 앞을 지나 대웅전으로 가서 그냥 좀 앉아만 있다 온다. 잠시 쉬는 순간은 딱히 필요한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마음이 된다.


절마다 미세하게 다른 풍경 소리에 반해 풍경을 산다. 소리를 담아 올 수 있다면 풍경을 사지 않겠지만 소리를 담아 올 능력은 없어서 절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고른다. 자주 사다 보니 풍경이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파란 하늘 아래 흔들흔들 시원하게 살랑거리는 그 자유로운 움직임이 '네 맘 알겠다' 하는 대답인 듯 들린다. 목조 건물 처마에 달린 풍경이 아름답다. 오늘은 연꽃이다. 조용하면서도 근사한 울림이 있다. 혼자 차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실 때 살짝 두드리면 맑은 소리를 들려준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이다. 마음이 툭 하고 내려놓아진다. 몸은 늘어진다. 지나치지 않게 게을러진다.


오늘의 커피는 예멘 하라즈 오렌지. 예멘 최대 커피 생산지인 하라즈에서 최고의 농부들이 생산한 최상의 커피다. 은은하고 풍부한 산미가 좋다. 커피잔을 살랑 흔들면 향이 더욱 진해진다. 과즙이 풍부한 열대과일이다. 오렌지 맛이 나며 깔끔하다. 상쾌한 신맛이다. 투명감이 느껴지지만 깊은 맛이 난다. 부드러운 초코 우유의 단맛이 난다. 자신만의 색을 가진 왠지 믿음이 가는 사람, 무한한 신뢰와 존경이 가는 사람, 하도 세심해서 무심한 사람을 닮은 커피다.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도 반색하며 마실 커피다. 중국집 음식을 먹을 때처럼 둥그런 회전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같이 마시고 싶은 커피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늘하고 새파란 하늘을 보며 가벼운 산책을 한 후 실실 웃으며 마시는 커피다. 달콤한 과일 냄새에 홀려 향기로운 사람으로 탄생케 하는 마법의 커피다. 이 커피를 마시면 초조해하며 짜증을 잘내는 생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환하게 마음이 밝아진다. 달고 조용한 마음이 된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에서 참 느긋하기도 해라, 하는 마음이 된다. 그럼 올해를 마무리하며 잠시 쉬면서 우리 같이 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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