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고수들은 말한다. 갈까 말까 망설임이 일 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싶을 때, 옛날 여행지에서 우연히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와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둥거릴 때, 여행 까지것 안 가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외치고 다녔는데 갑자기 여행이 떠나고 싶어질 때, 그런 때! 바로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왜 떠나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홀린 듯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란다. 먼 밤바다의 불빛이 깜박거리고 소박한 사람들이 정답게 살아가는 동네의 형형색색 불빛이 하도 따스해서 배낭을 꾸릴 수밖에 없다는 말에 20L짜리 내 배낭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각설하고 지금은 어디든 가야 할 것 같다. 아주 놀고 있네 하는 소릴 들을지언정 가는 게 옳다 싶다.
주변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혼자 있으면 수시로 정리한다. 책 모서리를 맞춰 포개고 이불을 널고 수건을 빨고 청소기를 돌리고 창틀을 닦는다. 뽀득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놓이고 푸근해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해야 하는 하루치의 기본 노동 중 오전 분량을 끝내고 식탁에 앉는다. 불확실한 상황에 달려드는 것 싫어하고 예측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니 새로운 기회는 애당초 찾아올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성공할 운이나 확률은 더 없기에 브런치 작가로 변신하는 동안은 뭔가 대단한 성공을 한 것 같다. 이 순간은 여행 가야지 하는 생각을 싹 잊는다.
해가 맑은 날이다. 날씨가 좋다는 뜻이다. 나가자! 하고 말하게 된다. 시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우울해하는 친구들을 다 부르자. 쨍한 겨울에 집에 틀어박혀 매번 뻔한 정치 이야기에 핏대 세우지 말자. 그래도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J는 빼자. 풍요로운 노년 생활을 꿈꾸려면 지금 즐겁고 건강해야지 않겠는가. 아름답고 따뜻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할 지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같이 놀자.
오늘의 커피는 파푸아뉴기니 블루마운틴. 크기와 모양이 고른 예쁜 원두다. 조금 진한 오리떼기 색이다. 원두 봉지를 뚫고 퍼지는 캐러멜향에서 달달한 오리떼기 맛이 날 것 같다. 물 온도 92° 원두 20g으로 칼리타 핸드드립 해서 담백하고 고소한 커피를 만든다. 복잡하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단순한 아로마는 아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하고 성실한 마음이 느껴지는 맛이다. 친구들 입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동안 같이 놀아준 마음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다. 지랄 맞은 성격을 개성 있다고 해주고 우기고 떠들어대는 데도 손절하지 않고 견뎌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비록 커피 한잔이지만. 우리가 내년에도 함께 놀 수 있어서 다행이다. 거기에 설렘까지 추가하자. 우리의 수다는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올해보다 나은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 것이다. 우리는 밝은 수채화 물감 같은 색으로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