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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Jan 24. 2022

125 여행이 밥 먹여주지는 않지만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블렌드

이리하여 나는 가능한 그녀의 시야 안에 머물기 위해 신경을 써왔다. 밤의 기야마치와 본토초에서, 여름의 시모가모 신사 헌책 시장에서, 나아가서는 나날의 행동 범위에서. 도서관에서, 대학 생협에서, 자동판매기 앞에서, 요시다 신사에서, 데마치 야나기 역에서, 하쿠만벤 교차로에서, 은각사에서, 철학의 길에서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188쪽. 귀여운 아가씨와 순정파 대학생, 사랑스러운 괴짜들이 만들어가는 교토발 청춘 판타지다.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내용에 잠시 할 일을 잊고 푹 빠진다.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동호회 여자 후배를 사귀기까지의 연애 전략이 재밌게 그려져 있다. 교토의 일상과 본토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교토 여행을 계획하게 다. 위 글은 모든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나타날 수 없는 정도의 마주침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흑발 아가씨의 천진난만한 이야기 일부다.


 이 글을 읽고 교토 여행을 계획한다면 겨울에 떠나길 권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고 비교적 방 값이 싸기 때문이다. 저녁이 될 때까지 무작정 싸다니고 장을 보고 완두콩밥과 양배추샐러드 정도는 만들어 먹는 저렴한 여행가능하다. 간사이 공항에서 하루카를 타고 교토역에 내려 교토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며 걷는 도보 여행은 가성비가 좋다. 개점한 지 80년이 되어간다는 이노다 커피점, 1982년에 문을 연 게이분샤 이치조지점, 정교한 안목과 자부심으로 역사가 오래된 노포, 부부(요시다 교이치 씨와 이쿠미 씨)가 함께 일한다는 가모강가 골목에 있는 와이프 앤드 허즈번드 카페 등을 둘러보는 여행은 부산스럽지 않고 재미있다. 교토 사람들의 검박한 식생활을 느끼고, 고양이마저 무심하고 초연하다는 철학의 길을 산책해도 괜찮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어 찾아간 곳이 일상이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면 여행의 의미가 무색할 수 있지만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교토로 가즈아~ 하는 유혹이 절할 수도 있다.


 당장 떠나기 어려운 현실을 커피로 대신한다. 이노다 커피점에서는 다섯 가지 종류의 원두를 볶아 진하게 뽑은 블렌드 커피가 유명하다. 와이프 앤드 허즈번드 카페는 견과류 파운드케이크와 카페오레가 주력 메뉴다. 오늘의 커피는 그곳의 맛과 분위기를 상상하며 온두라스와 니카라과를 3:7 비율 블렌드 핸드드립이다. 호박고구마의 뭉근한 단맛과 건조하고 포실한 식감이 좋다. 고소하고 앙팡진 쓴맛이 낮고 부드럽다. 교토 아줌마가 마른빨래를 걷는 풍경이 떠오르는 커피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낯선 시간 속을 헤매러 갈 계획을 세자.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 속에 쫓기던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쉬자.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려 보자.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나이 든 나는 어떤 모습인지, 내 삶에 윤기를 주는 것들은 무엇인지. 오늘의 커피는 남은 시간은 자유롭고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나다운 모습을 지키려 애쓰며 성실히 사는 나를 응원하는 거피다. 같이 마시자. 그리고 교토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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