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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Jan 29. 2022

128 속이지 말고 변명하지도 말고

에티오피아 코사 내추럴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에 잠겼다.


리카의 생활은 그날을 경계로 달라졌다. 그때는 그렇게 뚜렷이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돌이켜 보면 확실히 그날 아침 이후,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변화의 계기는 고타와의 섹스가 아니라, 그날 아침의 정체 모를 만능감이었던 것 같다.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 56쪽. 돈에 휘둘리지 않고 펑펑 쓸 수 있는 돈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메자와 리카는 행복했을까, 죄를 짓지 않았을까. 일본에도 투자라는 이름의 투기가 있고 '여자행원 공금횡령사건'도 있다. 나도 좀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 평범한 나의 불행과 타인의 아름답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행운 사이에서 오는 박탈감이 그녀를 자극했을 것이다. 늦었다는 생각에 이미 늦어 버려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돈의 유혹이라 말한다. 처음 한 번에 이끌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떨려서 올가미의 매듭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닿는다. 불길하고 거칠고 생생하고 무서운 돈에 대한 묘사가 비리다. 알싸하고 매콤한 돈의 맛을 알게 된 주인공이 끈적한 공기 속에서 땀을 식히는 풍경이 억지스럽다. 무던하던 주인공은 왜 그리 되었을까, 이유 명쾌히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의 커피는 에티오피아 코사 내추럴. 리카에게 건네고 싶다. 섬세한 떨림과 도도하고 역동적인 샤우팅을 갖춘 보컬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커피다. 궁핍하지만 풍요로운 영혼이 담긴 외롭고 쓸쓸한 맛이다. 좁은 주택들 사이에서 부버석거리는 바람에 단맛과 새콤함이 섞이는 커피다. 하늘은 그냥 맑고 미세먼지 없이 멀끔하게 높다. 낮은 구름은 가끔 아까운 볕을 가린다. 책 읽기를 멈추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사소한 안부와 시시콜콜한 일상을 는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겹게 느껴지는 건조하고 버석 마른날, 안부를 묻고 답하는 동안 마음은 습기를 머금은 듯 부드럽다. 에티오피아 코사 내추럴감질감질한 뜨거운 햇살에 맛이 든 복숭아 향이 난다. 달다리한 쌉쌀함이 좋다. 단정하고 따뜻하다. 속이 단단한 자신감 넘치는 여성을 닮았다.


 리카는 익명의 누군가가 전하는 위로와 남편의 너그러운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어디선가 리카처럼 죄에 젖어가는 사람을 만난다면 먼발치에서 지켜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불안한 마음의 길을 따라 우리는 하릴없이 무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외롭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대체로 행복하지 않기에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외줄 타듯 욕망과 범죄 사이에서 비틀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리카의 행동에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직하지 않은 태도에 비난만 할 수 없어 커피를 마시며 리카의 내면을 데면데면 보지 않고 자세히 관찰자 시점으로 보려고 애쓴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리카처럼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내 답은 잠시 침묵. 지금은 그저 활기 있게 즐겁게 커피를 마시자. 삶을 배신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기로 하자고 속엣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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