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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Jan 31. 2022

129 맨날 혼자, 그래도 될까?

멕시코 핀카 라 세이바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가을, 열일곱 살의 가을이 찾아왔다. 나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 하늘의 종류는 다양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도 있었고, 구름이 높게 깔려 새하얀 하늘도 있었다. 지붕과 지붕 사이 손바닥만 한 하늘도 있었고, 막 철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고 난 뒤의 텅 빈 하늘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낮은 하늘을 좋아했다. 비가 내리면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빗줄기의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고 듣는 빗소리도 있었고, 바닥에 엎드려 가까이 듣는 빗소리도 있었고, 혼자 자다가 깨면서 듣는 빗소리도 있었다. 처음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때,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게, 세밀화처럼 선명하게, 해와 달처럼 유일무이하게 내 눈과 코와 입과 귀와 몸에 와닿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 평범해지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나를 외롭고 가난한 소년으로 만들었다.


 원더보이 - 김연수, 217쪽. 나는 정훈,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진 소년이다. 우리가 지나온 그 시절을 잊지 말고 자신에게 진실하라고 말하는 소년이다. 정훈에게 멕시코 핀카 라 세이바를 주고 싶다. 진하지만 담백하고 희미하게 짭조름한 단맛이 난다. 넉살 좋게 슬픈 쓴맛과 애틋하게 기쁜 단맛이 나는 모순적인 맛이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맛이라 하자. 우리 마음이 늘 바라는 노래를 닮았다. 하찮은 정성과 지루함이 모여 따뜻한 내일이 만들어짐을 안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처럼 발꿈치로 바닥을 세 번 톡톡톡 치는 것만으로 원하는 곳에 갈 수 없음을 알기에 오늘도 확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늘의 커피는 느슨한 호흡으로 세련되고 기품 있게 마시면 좋겠다. 담백하고 달달하며 가볍고 거칠다. 순간순간 부딪히는 비장하고 애처로운 삶의 고단함을 단번에 날린다. 역시 내공이 센 커피다. 고디바 같은 명품 초콜릿은 아니지만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지리한 마음에 슴뿍 단맛을 안기는 키세스나 허쉬 초콜릿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커피다. 다시 시작되는 날을 위하여 건배하고 싶은 커피다. 그래서 정훈의 커피다. 방구석보다는 볕 드는 창가에 새초롬히 서서 헤픈 웃음을 실실 날리며 산뜻하게 마시는 커피다.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걱정스러운 일과 어려운 일은 잠시 미루며 온과 요를 만끽하는 커피다. 차분함과 고요함을 즐기는 그 맛이 쓸쓸하면서도 애틋하다. 막 벙그는 봄꽃처럼 노랗게 흐드러지는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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