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의 메일을 받았다.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 필립스 1200 시리즈와 굵기 조절이 쉽고 가볍고 자주 사용하기 좋은 하리오 전동 그라인더를 샀다는. 덕분에 홈카페를 근사하게 꾸몄다는 홈카페 홍보도 더불어. 투룸의 한 켠은 반짝거리는 커피 도구들로 장식되었고, 에스프레소 머신은 진하게 농축된 아주 쓴 커피를 높은 압력으로 빠르게 뽑는다는 기계식 설명도 함께. 고온 고압으로 추출된 원액을 우유에 섞어 마시기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기도 한다며 전자는 카페라테가 되고 후자는 아메리카노가 된다며 자랑한다. 친구들 방문이 기다려진다고 한다.
혼자만의 집이 멋지게 자리 잡은 모양이다. 자취는커녕 기숙사 생활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B의 독립은 반갑고 기쁘다. 스스로 이고 진 도덕적 책무에 결박당해 시름시름 앓을 때, 쓰는 글이 초라하여 글쓰기를 멈추고 싶을 때, 써야지 써야지 꼭 써야지 하면서 일주일이나 안 쓸 때, 백팔 번뇌로 새벽잠을 놓칠 때, 가진 것 없어서 크게 욕망한 것도 없는데 쥐고 있는 하나를 놓아야 할 때, 배신감으로 삶이 휘청휘청할 때, 생활 기반이 흔들리고 자신이 소멸되는 느낌에 눈물이 흐를 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조금씩 약해진다 여길 때, 확신은 있으나 증명할 수 없는 의심으로 꽉 찬 시간을 보낼 때, 속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없이 예민한 일을 피하려고 할 때, 양심의 목소리와 사회적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할 때, 상실감 무력감 자괴감 어리석음 같은 감정만 남았다 생각될 때, 삶이 오래 입어 무릎이 나온 운동복 같아 벗어던지고 싶을 때, 뭘 해도 순조롭지 않고 치실이 끼인 듯할 때. 나열한 것들에 어느 하나라도 해당사항이 있다면 방문 환영이라는 빨간 당구장 표시가 붙었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에 베토벤의 월광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자는 유혹은뿌리칠 수 없다. 모든 일을 미루고 달려갈 것이다.
오늘의 커피는 B의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기계가 추출한 원액에 뜨거운 물을 섞었다. 천정이 높고 내부가 넓으며 큰 창이 있는 카페 분위기 전혀 나지 않는 단정한 집에서 마신다. 브라질 다테하, 과테말라 안티구아 블렌딩이란다. 맛이 깊고 고소하다. 땅콩버터 바른 구운 식빵이 직각삼각형으로 하얀 접시에 누웠다. 구수한 커피와 어울린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쓴맛이다. 아래로 향하는 감정 곡선이 툭 끊어진다. 포근한 햇살 같이 따뜻한 커피다. 로즈마리, 레몬글라스, 오렌지 향은 없다. 거친 삶을 순하게 만드는 쓴맛이 근사한 커피다. 흰 벽에 붙은 세계지도와 바다를 품은 섬 사진이 감성미를 뽐낸다. 어디든 바다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사진 속의 바다일지라도. 잡은 손을 놓지 말자 했던 B는 지독히도 휘둘렸던 삶에서 나왔다. 고통의 시간대를 뚫고, 미련스럽다는 태도를 버리고, 난데없는 불운을 버렸다. 이기적이며 치졸하다고 비난받던 B는 이제 자신의 홈카페에 친구를 초대하고 경제활동을 하며 자신을 벌어 먹이는 생활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