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그때 우리의 시간은

케냐 AA

by 만델링

치즈인더트랩. 들어본 제목이라면 다음 중 어느 영역인지 궁금하다. 웹툰, 만화책, 드라마, 영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길 좋아하고 구글링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은 웹툰으로 이 이야기를 알았으리라 추측한다. 약간 구시대적이고 촌스러운 성향(나는 그런 편이다)이라면 툰으로 접했을 것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길 즐기거나 동네 카페에서 종종 만남을 하는 조 원장 멤버는 케이블 티브이 혹은 영화로 봤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웹툰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추천받았다. 처음 몇 편은 웹툰으로 보다가 그만 눈이 피로해져 끊었다. 한참 후 종이책으로 나왔다. 소장 가치가 있지 않음에도 일시불도 사버렸다. 그 책들을 나란히 세워두고 며칠 동안 신나게 읽었다. 행복은 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심을 가득 담아 시시덕거리는 것이구나 싶었다. 조 원장네들은 나이, 성별, 특기 별로 드라마 속 인물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특히 여자 주인공에 대해서는 드라마 밖의 생활도 잘 안다. 어떤 취향의 옷을 좋아하고 가방은 어디 메이커를 들고 집은 강남인지 강북인지, 아파트인지 전원주택 인지도 안다. 아, 각설하고 이야기 속 인물 이야기 좀 해보자.



키 크고, 매너 좋고,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의 모든 운동에 능숙한 대학 선배가 있는가. 얼굴은 대영박물관 영원한 인간전에 전시 중인 조각상 '아폴로 두상'을 닮은 선배는 어떠한가. 재벌 2세인 과 선배가 있는 대학을 다닌 적 있는지. 내게는 그런 인맥 없다. 대신 자기중심적이고, 늘 틱틱거리고, 억지로 술 먹이던 선배는 안다. 수업은 수시로 빠지고, 타임지 겨드랑이에 끼고, 예비역 임을 표 내는 얼룩무늬 옷 입고, 브랜드가 긴가민가 한 운동화 뒤축 꺾어 신고 다니던 선배는 기억난다. 기타를 뜯는지 퉁기는지 헷갈리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던 진상 선배도 있었던 것 같다. 드물게 도서관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몸을 축내던 선배는 지금도 가까이에 산다. 이런 캠퍼스 로맨스를 이야기하는 게 생경스럽다. 뻔한 이야기에 감동할 나이는 오래전에 지나고도 지났다. 그런 걸 모르는 딸아이는 엄마가 감동할 거라며 추천했다.

꽤 오래전 그때도 비슷한 인물은 있었다. 가난하고, 가정은 평탄치 않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과수석을 놓치지 않는 여주인공 홍설. 으르렁거리며 집적대며 삼각관계를 그리는 백인호. 궤변을 늘어놓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오영곤. 학점 따기 쉬운 과목만을 공들여 수강 신청하는 일상은 우프게도 비슷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유정은 없다. 태어났더니 그냥 부자였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성실하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움, 모든 조건 다 가진 인물은 단언하건대 우리 때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평등하고 그래서 모두 각자의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면에 자책은 차고 넘친다. 그 좋았던 학창 시절에 대체 뭘 했나 하는 의문이다. 대의명분 지극한 신념 없이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화염병 던지는 학우들 돕는다는 명분으로 민주광장 언저리에 소주병 배달하는 행동을 보였다. 최루탄 피한다며 눈 밑에 치약도 발라봤다. 민주광장에 앉아 반민자당 투쟁, 정권타도를 외치며 막걸리를 마셨던가 부추전을 먹었던가 아슴아슴하다. 이런 공적 대의를 들이대며 수업을 떳떳하게 빠졌던가 싶기도 하다. 이제는 전부 가물가물하다. 비싼 등록금 내고 지랄을 했구나 싶다. 장학금을 받았던가,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전공을 파고들고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더라면 지금 만화를 읽으며 자책하지 않겠지. 니 그러한가 말이다. 물어보고 싶다. 그때는 왜 그리도 인생을 가볍게, 밥벌이를 만만하게 여겼는가 말이다. 빌어먹을...


오늘의 커피는 만화책을 끼고 홀짝거리는 케냐 더블에이다. 케냐를 설명하는 것은 엄마의 잔소리처럼 듣기 싫은 설명일 테니 생략하고 그냥 닥치고 마시자. 풍성하고 화려한 향과 풍미에 대한 설명도 빼자. 고상하고도 젊음을 느낄 수 있는 여인의 커피임에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진다. 실제로 케냐 커피처럼 나이 든다면 멋진 인생일 것이다. 섬세하고 아니 세심하고 독립적이며 따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의 커피는 긴 연휴의 시작 앞에서 노브랜드 표 황탯국과 김치 한 종지, 비엔나소시지 당근 양파 볶음으로 후다닥 가족 밥상을 차리는 나를 불량하다 말하지 않는다. 시작될 초과 수당 없는 노동을 위한 에너지 비축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지은 솥밥이 더해지지 않았는가. 그러니 전한 집 밥이다. 오묘한 색에 마법이라도 걸릴 것 같은 하늘,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햇살, 폴짝폴짝 나부끼는 대추나무 이파리. 가을이다. 는 가을에 콧물 훌쩍거릴 일이 귀찮다. 피부가 가렵고 눈이 간질거리는 알레르기 상태를 건너뛸 수 있으면 좋겠다. 케냐는 침착하고 능동적으로 규칙적으로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응원한다. 욕심을 덜어내고 하루하루 나아가는 생활만이 지금 주어진 몫이라고 또 한 번 외친다. 그래, 견디는 것이 삶이다. 잠시 우리의 시간으로 타임슬립. 케냐를 마며 누군가를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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