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여러 끼의 밥을 차리는 마음이란
페루 찬자마요
비가 조록조록 내리니 좀 심심하다. 나른하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다. 모였던 친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기름기 묻은 소쿠리, 건더기만 남은 탕국, 일주일 내내 먹어도 줄지 않을 오색 나물, 윗부분을 도려낸 과일, 반쪽으로 나뉜 생선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냉장고도 더 이상 품어줄 수 없다고 소리친다. 명절 끝은 허탈하다. 고독한가도 싶다. 익숙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되풀이하는 일인데 할 때마다 어렵다. 들인 시간과 노동, 비용을 계산하면 늘 밑지는 일이다. 산술적으로 마이너스다. 앞으로 수년은 더 반복할 일이다. 일이 힘든 건 아니다. 느닷없이 닥치는 일도 아니고 해마다 정해진 날이 되면 되풀이되는 일일 뿐이다. 그저 적성에 안 맞고 재미없는 일이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손해보고 시간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먹고사는 일은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아이들도 자랐다. 꿈이라 부를 일은 아니지만 나를 윤택하게 하는 일은 있어야 하겠다. 막연하게 붙잡고 있던 일, 조금은 기쁘고 설레던 일이 쓰는 것이었다. 절박하지도 생업을 위한 것도 아니지만 오래 붙잡고 싶은 일이다. 매년 쌓이는 일기장이 내 삶의 발자국이다. 지금은 브런치에 쓴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을 보며 노기를 뺀다. 널브러져 뒹군다. 비가 그치고 달이 뜨니 이상하리만치 기운이 쏙 빠진다. 일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다. 취기 오른 얼굴을 쓰다듬고 부른 배를 두드린다. 무탈히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고 명절이 지나간다 싶으니 만족스럽다.
자두나무에 하얀 꽃이 실렁이던 봄에는 명치끝이 따뜻하니 해사한 풍경에 입꼬리가 올랐다. 초록초록 반짝이는 잎사귀와 장마가 지던 여름에는 저기압에 기운이 눌렸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막힘없이 제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 부러움과 다짐이 인다. 담벼락이 가로막힌 세상에 갇힌 건 아니지만 쳇바퀴 돌 듯 맞춰진 생활은 조금 삭막하다.
노곤해진 몸과 마음에 붉은 꽃이 위로가 된다. 꽃무릇, 잎과 꽃이 서로 만나는 일이 없다 하여 상사화라 부르기도 한단다. 서로 그리워만 한단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연인들을 빗대기도 한다. 애틋하여라. 붉디붉은 꽃더미 속에서 일상의 지루함과 피곤함이 스러진다. 몸 구석구석에 꽃 빛이 물든다. 휘청거리지 않고 별 탈 없이 또 명절을 보낸다. 자잘자잘한 이야기와 푸념과 소란스러움에 일상의 고단함이 둥실 날아간다. 참 잘했어요, 착한 어른이표 도장이 꾹 찍힌다.
오늘의 커피는 봄을 닮았다. 입안 가득 부드러운 바디감으로 풍부한 꽃향기를 느끼게 한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인 안데스의 기운이 느껴진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쭉 뻗어 화산을 동반한 지형에서 태어난 원두다. 환하고 밝은 맛이 있다. 페루 찬자마요는 버터맛이 베어 나오며 넛츠류의 고소함과 밀크 초콜릿, 캐러멜의 달콤한 향미가 좋다. 맑고 투명하며 깊은 쓴 맛이 난다. 로밧 로스팅기에 볶은 원두가 아니라 찻잎처럼 달군 솥에서 뭉근히 타지 않게 덖은 원두 같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하루쯤 쉴 수 있을 때 마시면 더 좋은 커피다. 오늘의 커피는 현실이 안겨주는 서운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롭지 못한 간격, 북적이는 생활에서 잠깐 비껴 나서 낮고 긴 조용한 호흡을 하게 한다.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관계가 피곤할 때 마시자. 사는 게 쉴 틈 없이 떠밀려 가는 느낌일 때는 더 맛있다. 애써서 앞으로 걸어가도 저만치 밀려나 있다고 느낄 때는 연거푸 마시자.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기분에 쓸쓸한가, 자꾸만 달아나는 내 삶이 애달픈가, 그럼 여기로 오시오. 친절한 마음으로 봄을 닮은 부드러운 커피 한 잔 드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