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셋이 모이면 그 중 스승이 있다고

페루 SHB

by 만델링

향이 다른 여인 셋, 카페에서 논다. 주문 내역을 보자. 카페라테, 카푸치노, 핸드드립 싱글 오리진.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를 동시에 주문하면 주인장은 바빠진다. 물론 사장님은 실력 있고 카페 운영이 능숙한 분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르바이트생이다. 두 음료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제대로 만들어 낼지 걱정이다. 둘 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섞어 만든다. 눈으로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우유 거품의 양이 많거나 적거나, 또는 시나몬 가루의 유무다. 까칠한 더블 A형과 시크한 O형을 입 다물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존재감 없는 B형은 드립 커피를 시켰으니 입방아에 오를 일 없다. 바리스타 2급 실기시험에서 완벽한 거품을 만들어 칭찬을 받았다는 그 아르바이트생이 맞는가 보다. 사장님이 채용한 이유는 두 음료의 차이를 확실히 알고 제대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더니 빈말이 아니다.


1.5cm 이상의 두꺼운 거품을 만들어 모자를 뒤집어쓴 듯한 머그잔을 대령했다. 붉은 루주가 발린 입술에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달라붙는 줄도 모르고 호호 마시는 모습은 천상 소녀다. 원하던 카푸치노를 마시는 더블 A는 가을볕에 더 반짝반짝해 보인다. 고운 거품에 흡족한 O도 유독 맑아 보여 기쁘다. 늘 문제는 B다. 칙칙하다는 소릴 듣는다. 새로움보다는 익숙함, 변화보다는 안정, 서프라이즈를 동반한 돌발 상황 절대 사절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편안하고 깔끔함을 추구한다. 섬세하지만 꼼꼼하지는 않다. 그런 까닭에 셋이 모이면 문제가 생긴다. 한 가지나 고정된 것에 얽매이는 것, 틀에 짜인 루트를 싫어한다. 단정히 정리된 것보다는 다이내믹하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자유롭고 시크한 영혼의 O. 긍정적이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평범한 걸 거부하고 새로운 융합과 실험을 추구한다. 4차원이라는 독특한 꼬리표가 붙은 A. 이들 셋이 여행을 갈 수는 있을까. 가고 싶은 곳을 말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 말하다 호홍~ 웃고 말았다. 과학적 근거 없는 성격과 혈액형의 관계라지만 혈액형별 패턴은 비슷하게 들어맞는다. O가 주장하는 강원도, A가 가고 싶은 제주도, 그냥 아무래도 괜찮은 B. 지리적 다양성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는 낙천적이라는 것이다. 그리도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만 할 뿐 성사될 확률이나 실패할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째 좀 웃긴다. 대책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건지. 마음은 벌써 팔도 방방곡곡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여행, 참 좋은 단어다. 모두가 기뻐하는 행복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주관과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이 집을 떠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자발적 양보와 배려가 나오는 신기한 일이 생길 것 같다. 머지않은 때 가깝고 경치 좋은 곳에서 짧게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오늘의 커피는 붉은빛으로 아니 주홍빛으로 물드는 낙조가 보이는 커피다. 사랑하는 남녀가 해 질 녘 바닷가에서 이별을 할 때 서로 좋은 친구로 남는 게 좋겠다며 거짓말하며 마시는 커피다. 남자의 눈이 벌게질 때 여자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날아오고 남자는 이유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래도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때 마시는 커피다. 캬, 역시 논리가 부족하다. 연애소설은 물 건너갔고 역사소설이나 쓸까 보다. 소설가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을까, 이야기의 인물들은 주변에 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화자로 탄생시킬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 커피다. 마른풀, 건빵 같은 고소한 쓴맛이 좋은 커피다. 살짝 얼린 홍시의 담담한 단맛과 신맛이 핀다. 쌉쌀한 커피 향으로 이별을 말하는 남녀를 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뭐랄까 그녀는 좀 달라. 힘들게 애쓰지 않아도 남들에게 신뢰를 얻고 본능적으로 답을 알아내는 센스가 있어.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납득하는 남자 주인공을 생각해본다. 오늘의 커피는 논리와 기준에서 벗어나 감성으로 마시자. 시원한 풀밭이 눈앞에 펼쳐지고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의 주홍빛이 보인다. 낭만적인 커피다. 이룰 수 없어도 꿈이라도 꾸자고 말하는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