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같이 걷는 건 어때?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내추럴

by 만델링

내가 걷고 싶은 길은 쭉 뻗은 아스팔트 말고 구부러지고 푸석거려도 아늑한 길, 늘짝늘짝 뚜벅뚜벅 소박한 길이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걷기보다 천천히 두리번두리번 걷는 길이다. 곤한 영혼에게 잠시 틈을 주는 길을 걸었다. 삽상한 바람, 파란 하늘, 싱그러운 바다가 함께 하는 곳으로 갔다. 행인은 으로 수성 풍부하고 깐깐하다. 안으로 따뜻하고 보드랍다. 같이 걸었던 길이 너르고 다채로워 감동이었다.


작고 아담한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말미오름으로 가는 길은 인기가 덜한 탓에 흙길 그대로다. 평소 봐왔던 오름과 달리 순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오름이다. 허리까지 높게 자란 억새가 무성해서 토토로라도 만날 것 같은 분위기다. 성산포 바다로 내달릴 듯하고 왼쪽에 우도봉, 오른쪽에 성산봉, 제주 동쪽의 들판이 두루 보이는 풍광이 기막힌 곳이다.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깎아지른 주상절리와 매혹적인 솔숲을 보며 걷는 외돌개~보목항 코스는 볼거리가 많다. 물과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섰다 하여 외돌개라 불리는 바위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하도 외롭고 쓸쓸하여 눈물도 나지 않는다. 외롭고 고단함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바위는 파도가 친구라 늘 철썩이며 이야기하고 해가 뜨고 지는 걸 본다. 이중섭 화백이 살던 집을 살리고 그 옆에 미술관을 지었다는 이중섭 미술관에는 부인과 주고받았던 애절한 그림엽서들이 많다. 천지연 폭포 위로 걷는 동안에는 난대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제주 남쪽 서귀포에서도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곱히는 보목항은 자리돔 잡이로 유명하다. 한자리에서 일생을 머물며 '자리를 돈다'라고 자리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올레꾼은 자리돔 물회와 갈칫국을 주로 먹는다. 나는 갈칫국을 먹었는데 비리지 않고 칼칼하고 담백한 그 맛에 놀랐다. 비린 생선 갈치가 국으로 식사에 오를 수 있음이 참 뜻밖이라 맛있게 먹고도 낯설었다.

2박 3일로는 턱 없이 부족 걷기다. 아름다운 화산섬으로 올래?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하지 않고도 신산스러운 밥벌이에 지친 몸을 쉬기에 딱 맞춤한 곳이다. 다보면 뻐근하고 벅찬 기운이 오른다. 같이 걸을 친구, 빛의 속도로 톡톡 하길.


흐린 하늘로 가지를 뻗은 나무들은 물을 담뿍 들이마시고 키가 성큼 자랐다. 팔랑거리는 이파리에 달린 빗물이 유리구슬 같다. 분위기로 치면 가을은 역시 비 내리는 날이 최고다. 서라운드 입체음향의 빗방울 전주곡을 종일토록 무한반복 덤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집에 홀로 오도카니 앉았더라도 체크나 아가일 무늬의 양말을 신고 가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 비 내린 후의 차갑고 투명한 바람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지나갈 날을 기다린다. 맑은 가을, 흐린 가을, 비 오는 가을도 좋지만 진정 설레는 날은 바람 부는 가을이다. 오름의 허연 억새가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그 유려한 자태가 눈에 어른거린다.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바람은 사물을 통해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그득한 억새밭을 지나는 바람을 우리는 보았다고 표현한다. 억새를 흔드는 그 기분좋은 바람을 보고 싶다.


내리는 비에 커피 향은 낮게 고여 입에 침 고이게 한다. 중후하게 끓는 물소리마저 새콤하게 들린다. 잘 갈린 원두의 고소한 내음이 타박타박 걸어 나온다. 누구라도 똑똑 문을 두드리며 커피 좀~ 한다면 찬장 속에 꼭꼭 숨겨두고 정말로 아껴아껴 먹는 원두를 꺼내어 같이 마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들리는 모든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오늘의 커피는 봄이라 부르기가 쉽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가을이 된다. 맑고 경쾌한 첫맛은 가볍고 활달한 소녀를 떠오르게 한다. 비강을 통과한 향과 쌉쌀하고 직선적인 쓴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은근하게 고인 맛은 내공 9단인 성숙한 여인을 느끼게 한다. 섬세하고 모던하며 결이 고운 이미지의 여성이 그려진다. 그슬린 듯한 쓴맛과 향긋하고 나른한 맛이 난다. 커피잔의 꽃무늬가 피어오를 것 같은 향기다. 파워풀하고 녹아내리는 듯한 단맛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단맛에 맘이 푹 놓인다. 약한 듯하지만 심지가 강하다. 베네통 가디건에 랄프로렌 스커트를 입고 8센티미터짜리 나인웨스트 힐을 신었다. 또각또각 흔들림 없이 걷는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여성을 닮은 커피다.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내추럴은 섬세한 감칠맛에 반하고 절로 침이 고이는 신맛에 아찔해져 가을이 몸에 새겨지는 커피다. 비 내리는 가을에 저녁노을처럼 애잔한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 커피다. 디 무르고 약하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여성이다. 때때로 단호한 태도에 놀라는 일도 있다. 아담하고 날렵하다고 해두자. 근심과 걱정은저만치 두고 그냥 자신이 되어 보자. 같이 놀고 싶지 않은가. 맛있는 커피는 공짜로 줄게. 틈 없는 마음이 말갛게 따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