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먹어도 먹어도 가벼운

과테말라 후에후에 테낭고 미랄바예

by 만델링

어느 것 하나 남다르지 못했던 시간이 흐르고 중년이 되었다. 아이들은 웬만큼 자랐고 별 탈 없이 같이 산 사람은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졌고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 나도 그런 흐름에 비례하여 여유가 생기려나 했는데 그렇지 않다. 이론상으로 당연히 그리되어야 하는데 더 바쁘기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슬거리듯 말라지는 단풍나무 잎처럼 내 시간도 자꾸 바스러진다. 줄어드는 시간을 보상하는 일은 일기 쓰기, 삶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오늘의 일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자꾸 쓰다 보면 소설의 경지에 이르러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쓰고 또 쓴다.


각한 말을 들었다. 건강검진 후 당화혈색소 수치가 경계를 넘었다, 중성지방 수치가 범위를 넘었다,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기준보다 많다, 팔다리 좌우 불균형, 운동량 부족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향후 진료 안내까지 적힌 책자를 받았다. 내과 정밀 진료를 받아야 한다. 혈액이 끈적하고 혈관이 좁으며 당뇨(혈액 속의 포도당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태인 병)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몸이라는 이다. 달리 말하자면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밀가루 음식을 끊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 양질의 살코기를 먹고 꾸준한 운동을 하라는 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바로 실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처방대로 실천하면 허기져서 견딜 수가 없다. 연유가 듬뿍 든 식빵, 새우탕면, 노란 기장이 섞인 맨밥, 내가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밥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며 제일 좋아하는 탄수화물 군이다. 탄수화물의 단맛과 든든함에 익숙해져 양질의 다른 식품은 거의 먹지도 않는다. 맨밥을 나보다 맛있는 소리를 내며 먹는 인간은 보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밤중에 뜨거운 라면을 끓여 단무지를 베어 먹는 모습은 하도 소담스러워 저절로 침이 고인다고 한다. 여하튼 나는 참 맛있게도 먹는 사람이다. 물론 나쁜 식습관이다. 지금까지 문제없었는데 나이가 드니 문제가 된다. 그러니 고치고 바꾸기 더 어렵다. 일기장에는 식단을 새로 짜고 매일 신선한 과일과 고기를 섭취하는 것으로 썼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근력운동도 하고 매일 걷기도 하는 사람으로 썼다. 안심이 된다. 앞으로 당뇨병을 앓을 문제만 빼면, 어떤 방법으로든 병으로 진행되지 않게 노력할 것이 분명하니까 문서상으로 볼 때 나는 꽤 건강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는 친구에게만 한다.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한테 징징거리듯 끙끙거리듯 말한다. 한껏 아픈 사람인 양. 듣는 친구가 애잔하도록 살면서 좀 더 잘해줘야겠네 하는 마음이 들도록 느릿하게 말한다. 나 이제 너밖에 안 남았어. 우리 친구 맞지? 제일 친한 친구, 하면서 사각사각 말한다. 실은 일기장에다 쓴다.


오늘의 커피는 허기지다. 마음에 드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드는 조급함과 비슷하다.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는 문장처럼 허허롭다. 휘파람이 터지고 박수가 이는 파워가 있다. 사그라지는 노을빛을 바라보는 고즈넉하고 잔잔한 쓴맛이다. 블랙베리의 신맛이 있다. 고산 기후에서 자란 유기농 커피라 자랑하는 맛이 있다. 억새를 타고 넘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커피다. 물론 환청이다. 갈수록 거짓말이 는다. 말이 되게 거짓말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잘도 한다.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한다, 시치미 뚝 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남은 밥에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참기름을 넣어 잘 섞은 뒤 프라이팬에 구웠다. 아귀아귀 먹는다.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먹어도 먹어도 헛헛한 날이다. 네 인생이 맘에 드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미 답했다. 행복하지 않아도 표 내지 않을 수 있다. 로소 어른이 되었다. 싸워서 이겨도 후련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는 것도 싫다. 이럴 때 한번 제대로 져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주 반잔+테라, 가장 맛있는 폭탄주를 마신다. 이제 그만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