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K 반지처럼 환한 달이 떴다. 하얗고 밝은 노란빛이 참으로 근사한 만월이다. 정수기 물이라도 떠놓고 간절히 빌어볼까 싶은 마음도 든다. 딱히 어느 것 하나에 대한 빌어 봄이 아니라 그냥 이것저것 버무려 빌고 싶다. ~하게 해 주십사가 아니라 ~하지 않게 해달라고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고 싶다. 청초한 밤하늘 아래 엎드려 절하는 중년 아낙을 상상해보자. 이웃집 별들이 아낙 곁으로 내려와 귀를 쫑긋 세운다. 아낙의 바람은 좀 많다.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게, 애매하지 않게, 믿음을 배신하지 않게, 수치심을 참지 않게, 감정의 민낯이 드러나지 않게, 느닷없이 떠나지 않게. 별들이 수군댄다. 삶이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지. 상심하지 말자. 비록 슬프긴 해도 살아보자. 소신껏 견실하게, 합리적으로 냉정하게, 서둘다 그르치고 후회하지 않게 살자. 오래 살던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예측 같은 것들이 있다. 직감이라 하자. 그건 그대로 믿자. 당혹스럽지만 인정하는 것이 낫다.
오늘의 커피는 약간의 꽃향기와 상큼한 레몬향이 섞였다. 달달하고 아릿하다. 저절로 콧구멍이 벌렁벌렁 입가가 움질거려진다. 경쾌하게 입안을 채우는 쓴맛에 반한다. 나긋나긋 담백하며 단단하다. 적당히 알맞은, 딱 그런 느낌이다.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변이 바라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하자. 바다로 스미는 오렌지빛 석양을 볼 수 있다. 가을이 쑥 들어와 추위를 부르기 전에 훌쩍 떠나고 싶어라. 학문을 하는 학자로서 글을 쓰는 사람 말고 지어낸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내고 그 책을 팔아 밥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더라.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은 세계여행의 달인이다. 모여서 가는 패키지여행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지 않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서 다녀온다. 다녀오고 난 후에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 그리고 다시 떠나고 또 돌아온다.
최근에 읽은 소설에는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세 들어서 남자의 일상을 찾아내고 그 부인의 흔적을 보면서 그들의 관계를 몰래 보는 여주인공이 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의도적으로 세 들어가는 여자라니 상상으로도 그리기가 어렵다. 그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편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소설가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싶다.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소설가가 추천하는 여행지는 가고시마 현의 7200년 된 조몬스기가 숨 쉬는 원령공주의 숲이다. 채 몇십 년도 버티지 못하는 사람의 관계를 생각할 때 수천 년을 사는 조몬스기를 떠올리면 안개가 눈물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빼곡한 숲에서 한밤 온천탕의 수증기가 모락모락 나오는 것 같다. 시간이 멈춰 선 것 같다. 쓸쓸해진 가슴에 슬며시 샘솟는 그리움의 향을 기억하는 커피 한잔 마시자. 떨리는 마음을 안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시면 좋다.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에 존중과 예의를 다하자. 화양연화의 꽃 시절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될 수 있다. 이겼는데도 마음이 안 편한 건 마음이 물러서다. 내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었더라도 이번에는 그냥 봐주자며 녹아지는 마음이 든다. 정의할 수 없는 얄궂은 마음과 급한 성미 탓으로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