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잠시 마음을 비우기로

니콰라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by 만델링

음이 아래위로 가늘게 떨리어 아름답게 울리는 비브라토 같은 냉랭한 공기가 감도는 날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여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나는 윤기가 흐르고 탱글탱글하며 차기가 있고 단맛이 나는 하얀 쌀밥에 노란 달걀 후라이를 얹고 간장을 끼얹어 비벼 먹는 아침 식사를 즐긴다. 간간하고 익숙한 맛에 친숙함이 드는 간소한 식사라 자주 먹는다. 배를 채우면 공허함과 황량함이 밀려가고 따뜻한 충만감이 몽글몽글 부풀며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또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구나, 기지개를 켜고 간단한 맨손 체조를 하고 앞치마를 입는다. 격한 노동이 기다리지는 않지만 어제 했던 그 일을 재미없는 표정으로 또 해야 할 것이다. 훌렁훌렁 벗은 놓은 옷을 세탁 바구니에 담고, 향수 냄새 아닌 땀 냄새나는 흰 양말을 애벌빨래한다. 창문을 열고 유선 청소기를 밀면서 리듬을 탄다. BTS의 DNA에 맞춰 움직인다. 일상이라는 것은 늘 이렇다. 비슷함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아마 평생을 이렇게 살겠구나 생각하면 겁이 나는데 변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무언가를 준비해야 찾아오는 기회를 낚아챌 텐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한 의식이 없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처럼 자신의 내면에 변화를 만들 준비를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마음뿐이다. 머무는 데서 벗어나는 두려움과 새로운 환경을 갈구하기도 하는 마음이 늘 다툰다. 조금 아쉽긴 해도 그냥 반듯하게 고만고만 선량한 척 이런 태도가 싫지 않다. 늘 애매하게 사는 미적지근한 방식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오늘의 커피는 바삭하고 촉촉하고 노릇한 느낌이다. 패스츄리와 크로와상의 사이를 오가는 초콜릿과 구운 아몬드가 든 빵을 부르는 커피다. 감칠맛과 인공 단맛이 아닌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그윽하게 쓴 쌍화탕의 깊은 맛이 느껴진다. 묵직함에 단단히 졸아든 단맛이 스며 있는 쓴맛이다. 연한 녹색으로 작고 흰 꽃을 피우는 라임과 에비앙 미네랄워터가 섞인 시원한 느낌으로 여운을 남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을이 벌써 깊어졌음을 말한다. 긴 머리 아가씨들의 뒷모습에서 가을이 떠나고 있음이 보인다. 매캐하고 칼칼한 바람을 남기며 가을은 안녕을 말할 것이다. 누렇게 끝이 말라 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겨울이 성큼 올 것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곧 겨울이 올 것이라는 건 알겠다. 우아하게 겨울을 맞아야지.


니콰라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코끼리 콩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풍당당하게 크고 굵다. 마라카투라종이다. 카투라종에 비하면 엄청 크다. 핸드밀을 돌리면 드르륵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손잡이를 돌릴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콩이다. 부드럽게 갈리는 콩알을 보니 속내를 말하고 싶어 진다. 숱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늘 똑같기만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데 그다지 쓸 데가 없다. 사람 사이에서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빈도가 줄어들기는커녕 되려 크게 한방 맞고 아득한 심연으로 빠졌다. 녹록지 않은 일상을 받아들이기 싫어진다. 이제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크게 기대하며 산 것도 아니다. 그냥 순리대로 믿으며 살았을 뿐이다. 내가 믿는 것과 다른 믿음도 있을 수 있음을 배웠다. 이 나이가 되어도 새로운 걸 배워야 한다는 것이 하도 쓸쓸해서 잠시 울어보기도 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더라. 기대를 놓으면 되는데 그걸 몰랐다. 오늘의 커피는 나른하고 발바닥이 간질거려진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주홍빛 노을이 퍼질 때 골목에서 가을을 배웅하는 커피다. 뒷덜미가 든든해지는, 무엇을 힘차게 해 나가면 좋을지 고민하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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