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 구름의 양이 많아 흐리거나 하늘이 낮아 나무에 닿기라도 할라치면 몸의 접히는 부분들이 찌그덕한 느낌이 든다. 계단을 오를 때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엄마의 무릎처럼 어긋나듯 삐걱대는 소리도 난다. 갱년기 장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관절이 불편한 것 말고도 다른 조짐들이 보인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순서대로 실행하는 일에 버퍼링이 생긴다. 버벅대는 경우가 잦아짐에 따라 행동을 천천히 하고 운동을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다.
먼저 지인의 추천으로 '루테인 오메가 3 아스타잔틴'을 주문했다. 침침하고 뻑뻑한 눈에 좋단다. 책을 많이 읽는 내게 필요한 영양제라고 했다. 노화로 생기는 황반변성을 예방하고 안구 건조증을 지연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샀다. 왜냐하면 하루에 한 알만 먹어도 충분하다니까. 밥과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감소증이 급히 진행되기에 단백질을 따로 보충해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꽤나 설득력 있다 여겼다. 그래서 300세트 한정, 추가 2세트 증정 상품을 카드로 샀다. 초유 단백과 콩에서 추출한 식물성 분리 대두단백이 균형을 맞춘 마시는 단백질이라 금방 근육이 붙을 것 같다. 건강식품을 준비했으니 이제는 운동만 시작하면 건강한 중년 생활이 펼쳐질 것이다.
내친김에 걸으러 갈까 하다가 이내 귀찮아져서 취미생활에 몰입한다. 소설 읽기다. 소설을 읽다 보면 삶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간접 경험하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이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대입하는 노력은 재미있다. 소설 읽기를 통해서 까뮈나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처럼 치사하고 비열한 세상의 부조리나 구체적인 모순을 지적하여 분석하고 고발하는 정신적인 통찰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자신의 무능과 모자람을 느끼고 점점 사회를 기피하는 자기 방어기제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소설 읽기를 경계해야겠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또 한 권의 책을 읽는다. 역시 중독이다.
오늘의 커피는 이름이 길다. 긴 이름 속에 녀석에 대한 정보가 엄청 들었다. 일단 생두 생산지다. 에콰도르, 낯설고 생소하다. 에콰도르도 원두 수출국이었다! SHG는 재배 고도다. 최소 1200m에서 재배됐을 것이다. 풀리 워시드 가공법이니 내추럴과 달리 커다란 수조에 넣어 과육을 다 벗겼을 것이다. 15UP은 스크린 사이즈다. 콩알의 크기를 말한다. 15, 조금 작은 편이다. 볶은 원두를 사서 집에서 내려 먹더라도 알게 되는 건 많다.
에콰도르 이 녀석, 참 깔끔하고 산뜻하다. 심심하고도 깊은 맛을 낸다. 귤, 피칸, 비스킷, 호두, 피스타치오, 크랜베리, 건조 블루베리, 구운 아몬드를 꼭꼭 씹으며 마시는 느낌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왜곡 없이 할 일을 하는 사람 같다. 뭐든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당장 해야 하는 일과 밑그림을 그리고 나중까지 이뤄 나갈 일을 매뉴얼대로 실행하는 우직한 사람을 닮았다. 가볍지 않고 무겁지 않고 격하게 쓰지도 그득하게 시지도 않은 커피다. 모두에게 90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반듯한 커피다. 연분홍 벚꽃이 아른거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에 노랗게 물든 유채꽃이 보이는 꽃 커피는 아니지만 터벅터벅 걸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손 흔들어 응원하는 커피다. 청귤의 산뜻한 향미가 바람에 실린다. 간질간질 기분 좋은 만남을 기다리는 커피라고 하면 좋겠다.
이제는 무조건 밀어붙이거나 최대한 미루든가 하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시간은 유한하니 머뭇거리면 안 된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변명이 아니라 설명을 해야 한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사람 바보 만드는 게 친구는 아니다. 설명하지 못하면 잘못한 것이다. 진실은 피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끝까지 한번 지켜봐 볼까. 그러면 더 단단해지고 그 입장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결정을 미루지는 말아야 한다.에콰도르 녀석이 강력하게 말한다. 힘내요. 아,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필요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