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0일 2,224명의 탑승객을 싣고 영국의 사우샘프턴 항을 떠나 미국 뉴욕을 향해 출발한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밤 11시 40분에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동쪽 600 km에서 20미터 높이의 빙산과 충돌해서 침몰하여 1,514명이 사망했고 생존자는 710명에 불과했다.
빙산과 충돌 후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여성과 아이들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선원들이 여성과 아이들을 구명정에 먼저 태우려 소리치자 가족을 두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선원이 갑판 위의 한 여성에게 말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나는 배에 남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녀의 남편은 “여보, 어서 보트로 올라가”라고 아내를 재촉하자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나는 혼자는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배에 있을 거예요”. 계속된 재촉에도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두고 구명보트로 옮겨 타지 않았고 그것이 선원이 그들 부부를 본 마지막이 되었다.
당시 세계 제일 갑부였던 애스터는 그의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그에게 구명보트에 오르라는 선원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며 마지막 남은 한자리를 어느 아일랜드 여인에게 양보하고 갑판 위에 앉아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태우면서 구명보트를 타고 멀어져 가는 임신 5개월 된 아내에게 소리쳤다.
“사랑해요! 여보!”
그는 며칠 후 안타깝게도 배의 파편에 찢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성공한 은행가 구겐하임은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에 화려한 턱시도로 갈아입으며 이렇게 말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답게 죽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런 유언이 담긴 쪽지를 남겼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요. 나는 금수보다 못한 삶을 살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요”. 그는 죽어가면서도 진정 신사의 품격을 유지한 사람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2번째로 부자였던 미국 메이시스 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도 타이타닉 호에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구명정을 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의 아내는 한사코 그와 함께 남아 있기를 원하자 구명보트 책임선원이 67세의 고령자인 슈트라우스에게 아무도 슈트라우스 씨가 부인과 같이 구명보트에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권유하자 그는 단호한 말투로 “나보고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대답하며 생사의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63세인 아내와 갑판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현재 뉴욕 브롱코스의 그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 위에는 “바닷물로도 침몰시킬 수 없는 사랑”이라고 적혀 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라는 여인도 한사코 남편을 두고 구명보트 타는 것을 반대하자 그녀의 남편은 할 수없이 주먹으로 그녀를 쳐서 기절시킨 후 구명보트에 태웠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구명보트였고 그녀는 다시는 남편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 후 평생 재혼하지 않고 남편을 그리워
하며 살았다.
타이타닉 침몰 후 세월이 지나 생존자 모임에서 어느 여인은 자신에게 구명보트의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하며 말했다. “당시 구명보트에 제 아이 둘이 오르자 만석이 되어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 제 손을 당기면서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생존자 모임에서는 그녀를 위해 “이름 없는 어머니”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타이타닉 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White Star Line은 타이타닉 호 희생자를 기리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타이타닉 호에 남으면서 자신을 희생한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약자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