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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테크니션 Jun 20. 2020

금수저

서울 남산 공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범광장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범광장에 김구 선생의 동상 말고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동상도 있는데 이 독립운동가는 김구 선생에 비해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독립운동가는 바로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입니다. 이시영 선생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오성 이항복 선생의 10대 손으로서 그의 가문은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일 뿐 아니라 당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지닌 조선 최고의 갑부 집안이었습니다. 이 조선 최고의 명문가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시영 선생은 형제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1885년 20대의 나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해서 당상관에 진입한 이시영 선생은 그야말로 최고 명문가 집안에다가 엄청난 부잣집의 자재로 요즘 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조선 최고의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았던 이시영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그의 인생도 험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일본이 강요하자 교섭 국장이었던 그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조약을 강력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박제순이 <을사늑약>을 찬성하고 을사오적이 되자 당시 그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즉각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망하자 이시형 선생과 형제들은 모두 모여 가족회의를 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가족의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전 재산을 독립운동하는데 바치자고 장남인 건영 씨가 제안하자 나머지 5형제도 모두 찬성하여 당시 쌀 3 만섬(지금 시세로 6백억 원)을 모두 처분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이때 처분한 전 재산은 교육 진흥과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된 신흥강습소를 위해 쓰였고 이 신흥강습소는 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체가 된 만주 신흥 무관학교로 확대 개편되었으니 이들 형제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은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이시영 선생의 가문이야 말로 진정으로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전 재산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독립운동과 조국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넷째 이회영 선생은 예순여섯의 나이로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을 세우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였고 장남 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 형제 모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순국하였으며 막내 호영은 실종되어 그 행방 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으로 망명한 6형제 가운데 살아서 광복을 맞이하여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이시영 선생 단 한 사람였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선생의 고초도 그의 형제 못 지 않았습니다. 1916년 선생의 부인은 이시영 선생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다 과로로 쓰러져 사망하였고 1919년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만주에서 상하이로 떠나올 때 어린 아들들을 만주에 두고 와서 셋째와 넷째는 구걸로 연명하다 아사했고 둘째 만이 만주에서 모든 가족을 잃은 후에 아버지가 상하이에 있을 것이라는 가냘픈 희망 하나로 무작정 찾아와 극적으로 상봉하였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난 이시영 선생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금수저는 나라의 독립운동에 바치고 정작 본인은 흙수저 보다 못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해방 후 이시영 선생에 대한 고초를 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예전에 이시영 선생이 소유했던 토지를 일부 나마 찾아 주겠다고 하자 “내 재산 찾으려고 독립운동한 게 아니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시영 선생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시영 선생은 1948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패와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국회에 스스로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습니다. 이시영 선생이야 말로 본인과 본인 가족의 안위와 영달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진정한 금수저였습니다.

이 나라에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과 같은 매국노도 있었지만 이시영 선생과 그의 형제 같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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