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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테크니션 Jun 20. 2020

삼관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그 종목에서 세계 최고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따는 선수는 정말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메달을 두 개 딴 선수는 이관왕, 세 개 딴 선수는 삼관왕이라 부릅니다. 미국의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따서 8관왕이 되어 세계 신기록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세 번의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은 모두 18개입니다. 정말로 대단하고도 영광스러운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광스러운 다관왕도 있지만 역사에 남을 치욕스러운 다관왕도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매국노 삼관왕을 기록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천하의 공적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삼대 사건인 을사늑약, 정미 7 조약, 경술 한일합병조약의 주적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해당되어 매국노 삼관왕에 오르는 치욕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05년 11월 일본은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고종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하여 조정의 반대가 심하자 일본은 8명의 조정 대신 하나하나를 협박하면서 설득하였습니다. 8명의 대신 중 이완용을 비롯한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5명이 조약을 찬성해 결국 을사 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5인이 바로 <을사오적>입니다. 당시 반대한 삼인은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이었는데 그중 민영기 이하영도 나중에 친일로 돌아서서 이들 7인은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아 막대한 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이중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고 조약 체결 이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매국노 삼관왕을 위해 더욱 정진하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보던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그리고 참서관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회의 참석이 불발되자 이준 열사는 통분을 금치 못하고 헤이그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완용은 고종을 강요해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순종이 즉위 하자마자 일본은 대한제국 식민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군대 해산을 골자로 한 한일 신협약 즉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도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순종의 재가를 받고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체결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매국노 이관왕에 등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결탁해 같이 조약을 체결시킨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대신 조중웅,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 등을 일컬어 <정미칠적>이라고 부릅니다. 정미칠조약이 체결된 지 3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겨 일본제국에 합병되는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이 바로 우리가 경술국치라고 부르는 한일합병조약입니다.  사실 이 조약은 8월 22일 이미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이완용에 의해 체결되었는데 일본 측이 일주일 미루고 있다가 8월 29일 순종의 조칙 형태로 발표되었습니다. 이완용이 매국노 삼관왕을 달성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이완용과 같이 조약을 체결시킨 대신들을 <경술국적>이라고 합니다.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 대신 민경석, 탁지부 대신 고영희, 외부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조중웅, 친위부 장관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 승녕 부총관 조민희가 바로 그들입니다. 

매국노 삼관왕에 등극한 이완용이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은 15만 엔 지금의 시가로는 30억 정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지금 돈 30억에 나라를 팔았다니 참으로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에서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를 칭송하는 한편 그를 단죄한 안중근 의사를 맹비난하였습니다. 그 후 이완용은 12월 22일 명동 성당 정문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다 군밤 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에 의해 세 차례 칼에 찔렸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때 폐에 상처를 입어 평생 고생하다 1926년 2월 69세로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을 게재하였고 그가 묻힌 전북 익산 낭산리 산의 무덤은 자주 훼묘가 되어 후손들이 파묘를 해 화장하였다고 합니다. 매국노 삼관왕의 말로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4절 가사가 다시금 생각납니다.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 역사는 흐른다”. 오늘도 역사는 흐릅니다. 그리고 기억됩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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