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중학 시절
겨울방학 골목 어귀에서 만나자든 내 짝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강아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엄마가 고맙다고 짝지 주란다. 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자꾸만 주머니로 손이 간다. 이놈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두려움에 떠는 건지, 잠이 든 건지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내가 우습기도 했다.
검둥이는 그렇게 우리 집 마스코트가 되었고
저승사자 아버지 얼굴에 웃음꽃도 피웠다.
검둥이 후손들이 서울로, 풍기로, 울산으로
전국구로 세력 확산을 거듭하는 세월도 있었다.
검둥이가 병들어 아재에게 넘기고 온 날!
어무이와 삼형제는 꺼이꺼이 목이 메었고
아버지는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며 아픈 마음 을 못내 숨기려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파트로 이사 가고 이웃집에 넘겨진 깐돌이는
아침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검둥이도, 깐돌이도, 그 많던 후손들도
길에서 마주치면 호통부터 쳐대던 아버지도 없다.
남은 것은 기억 너머 저편 한 귀퉁이에
비로소 익고 익어 “추억”이 되어버린 그것들
넓은 마당, 등목, 검둥이와 깐돌이, 총총걸음
그리고 아버지의 옅은 미소.
저승사자 울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