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하얗게 불태웠던 유치원 원정기
"엄마, 나 영어유치원 가고 싶어요."
아마도 10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 저 말을 했을 때, '뭐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맞단다. 원래는 5세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이어서, 지금까지 유치원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그냥 유치원도 아니고 영어유치원이란다. 과연 아이가 "유치원"의 정의(?)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맞나, 재차 확인해 봤다. 유치원이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있는가, 왜 가고 싶은지에 대해 물어보니 아이의 대답이 재미있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 그냥 유치원은 애기들이 가는 거고 영어유치원은 형아들이 가는거래." 아, 요새 연말이라 내년도에 유치원으로 옮길 형아반 아이들이 얘기한 걸 들었나 보다. 그래도 영어유치원이라니... 조금은 긴가민가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가 가고싶어하는데 좀 알아볼까 싶었다. 그러나 그 시작이 그렇게 개미지옥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워낙 열정적인 엄마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 명성에 걸맞게 영유도 정말 차고 넘쳐났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후기가 좋은 몇 개의 영어유치원을 고르고, 문의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마음 속 1순위로 생각한 영어유치원은 설명회 대기조차 마감되었다며 더 이상의 대기접수는 불가능하단다. 아니, 아직 10월 말인데?? 어떤 곳은 이미 설명회도 끝났단다. 초조해져서 다른 곳 몇 군데를 더 전화해 보니 다행히 설명회 접수를 받고 있었다. 솔직히 후기만 봐서는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설명회라도 들어봐야 알 것 같았다. 알고보니 영유도 다 같은 영유가 아니라 학습식, 절충식, 놀이식이 있다고 한다. 천방지축 아들을 떠올리니 학습식은 절대 무리고, 놀이식이 제일 나을 것 같은데 놀이식 유치원은 몇 개 있지도 않고... 그나마 설명회 듣는 곳이 빡센 학습식은 아니길 바라며 설명회에 갔다.
이미 시기상 늦어서 설명회를 많이 듣지는 못했고 직접 간 곳은 3개, 전화로 설명을 들은 곳은 1개, 소규모 그룹상담을 받은 곳은 1개였다. 설명회도 처음에 갈 때는 아직 잘 모르니 모든 게 그저 "오오~~~"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그냥 이 곳이 내 아이의 성향과 맞는가, 그것만 고민되기 시작했다. 사실 소위 말하는 아웃풋보다는 그냥 아이가 다니고 싶으니까 기왕이면 제일 유치원스러운 곳에서 재밌게 다녔으면 했다. 그리고 기왕 다녀온 설명회, 상담이니 가능한 모두 대기를 걸어보자 싶어서 입학금 입금 일정을 체크하고 준비를 했다.
어라, 그런데 생각보다 입학금 선착순 대기라는게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첫 입금에서는 남아 대기 17번(남녀 비율을 가능한 맞춰서 입학시켜서 따로 대기번호를 부여한단다), 두 번째 입금에서는 대기 9번이 나왔다. 그 때서야 알았다. 아이 성향이고 뭐고, 선착순 입금이 성공해야 기회도 주어진다는 것을... 내가 선택해서 가려면 정말 부지런하게 많은 곳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입금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초조한 마음에 남은 설명회 일정을 뒤져 또 하나의 놀이식 영유를 찾아냈다. 사실 이미 설명회 신청도 마감이었는데 전화로 구구절절 상담하니 토요일 딱 한자리 남았다고 한다. 그 영유는 엄마가 설명회를 듣는 시간에 아이 성향 테스트를 볼 것이니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어떻게든 기회를 더 늘려놔야 한다는 마음에 그날 오후 일정이 조금 바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리고 설명회에 갔다. 아이는 처음에는 바로 유치원 안으로 뛰어들 만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중간에 너무 열심히 놀다가 옷이 푹 젖어 한 번 갈아입히고 나니 뭔가 안좋아졌는지 계속 집에가겠다고 성화였다. 이 모든 게 테스트 과정일 텐데, 설명회를 듣다가 불려나와 진땀을 빼며 아이를 달랬아는데 아이는 더욱 큰 소리로 "엄마, 나 수업듣기 싫어요. 유치원 안 갈래요." 하는 것이다. 아... 망했구나, 싶어서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시 영어유치원에 정말 가고싶은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의 대답은 "엄마, 나 그냥 유치원 가고싶어요." 하는 것이다. 그냥 유치원과 영어유치원이 뭐가 다르냐고 묻자, 아이는 그냥 유치원에서는 노는 것이고 영어 유치원은 수업을 듣는 곳이란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라 며칠간은 속을 끓였다. 알음알음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이 지역에 괜찮은 일반유치원이 몇 개 있었지만 아이는 외동이라 우선순위에 아무 것도 해당하지 않아(요새 맞벌이는 거의 기본값이라 점수를 쳐주지도 않고 따라서 우선선발접수에 넣을 수 없다)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연습삼아 처음학교로에 가입해서 경쟁률을 따지지 않고 그냥 원하는 대로 접수했다.
그동안 입금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학습식으로 유명한 영유 한 군데에는 선착순입금에 성공했다. 또 친한 엄마가 정보를 알려준 다른 영유에도 소규모 그룹상담을 신청해서 다녀왔다. 원래는 나 혼자 그룹상담에 가려 했는데 그날 갑자기 남편이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이 하원을 할 수 없다고 급히 연락이 왔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아이는 다른 선생님들이 놀아준다며 데리고 갔지만 일전에 설명회에 갔다가 아이가 하도 난리치는 바람에 나온 기억이 있어서 설명회를 들으면서도 계속 문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설명회가 다 끝나고 고 유치원 교실을 한바퀴 다 돈 다음에도 아이가 날 찾지 않아서 의아했다. 아이가 놀고 있다는 공간에 가 보니 처음 본 선생님들과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엄청 잘 놀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학습식 영유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다른 활동들도 많아서 그래도 재미있게 다닐 수 있겠다, 생각하여 상담받으러 온 것인데 아이를 예뻐하고 잘 놀아주는 선생님들을 보니 안심이 되고 아이가 그래도 유치원 가서는 어떻게든 잘 적응하겠구나 싶어서 안심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대기를 걸어둔 영유 한 군데에서도 또 추가등록 연락이 왔다.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1순위로 넣은 일반유치원도 선발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아, 결국 아이는 유치원에 갈 운명이었던 것이다. 11월 하얗게 불태운 유치원 원정대의 결과는 (비록 우선순위는 아니었지만)영유 2개 성공 + 원하는 일유 성공(사실 이게 더 장하긴 하다. 다만 일유는 노력보다는 운이기에... 내 노력은 사이트에서 접수한 것...?) 으로 막을 내렸다. 일단은 5세에는 일유를 보내기로 하고, 기존 등록을 걸어둔 영유 입학금 환불 절차를 겪으며 시원섭섭한 기분을 맛봤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은 이제 끝이 아니라, 내년도에 또 시작될 것 같다. 내년도 하반기에는 또 정보수집->설명회 참여->입금전쟁을 또 안 치르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내년도 하반기를 위해 연차를 넉넉히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길은, 육아와 교육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