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IDY Dec 23. 2022

사람이 아닌, 상황에 짜증을 내라

짜증나는 순간에는 서로의 탓을 하기보다, 차라리 상황을 탓하자

 오늘 아침은 늦게 출근했다. 요새 들어 밤에 늦게 잠드는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해서, 그래도 아침식사는 먹여서 보내야겠기에 주섬주섬 먹이다보니 평소보다 늦었다. 이제 옮긴 지 1년정도 된 새로운 회사는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있어서 딱히 지각의 개념은 없지만, 늦게 출근한 만큼 그 날이든 아니면 다른 날이든 근무시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것을 선호한다.(물론, 그 선호와 별개로 대부분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에 따라 출근하기 때문에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일찍 출근하고 나는 대부분 등원을 시키고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느 덧 월말이 다가오고 있고 다음주에는 남은 휴가를 다 털어서 쓰려는 계획에 오늘은 평소보다 시간을 좀 더 채워서 일하고 가리라 마음먹었다. 오늘은 평소 하원을 도와주시는 시부모님 대신 남편이 몇 시간 휴가를 내어 아이를 하원시킨다고 하니 마음을 놓았던 것도 사실이다.


 집에 오니 벌써 저녁 8시. 배가 고파서 저녁을 바로 먹고 싶었지만 아이가 자기랑 방에서 놀아야 한다고 조른다. 최근 저녁마다 한글 공부 책을 같이 읽고, 따라쓰고 했는데 그게 재미있었는지 꼭 엄마랑 해야 한다며 벌써 책상에 자리잡고 앉았다. 남편이 저녁을 차리는 동안 같이 글씨도 쓰고, 단어도 읽어준 다음 밥이 식기 전에 식탁으로 가서 밥을 후다닥 먹는다. 아이는 더 놀고싶었는데 아쉬운지 쪼르르 따라나와서 이번엔 다른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밥을 먹으면서 책 읽기는 힘드니 대신 동요를 틀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사실은, 동요라기보다 곤충이 나오고 각각 한글과 영어로 읽어주는 아주 단순한 영상인데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이는 곤충을 매우 좋아한다) 소리만 켜주고 영상은 끈 다음 나는 밥을 먹고 아이는 옆에서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하니 벌써 8시 반. 아이도 아직 안 씻었다고 한다. 내가 씻는 동안 남편이 아이를 씻길테니 재울 준비를 하자고 한다. 씻고 나왔는데, 아이는 아직 안 씻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씻기 싫고 계속 놀고싶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단다. 우선은 조금 기다리자는 마음에, 그 시간에 어질러진 집을 정리한다. 허물 벗듯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소파에 널부러진 겉옷을 옷장에 넣고, 거실에 뒹굴고 있는 책들과 장난감을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그래도 나올 기미가 없기에,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아이를 번쩍 들어 나온다. 씻기 싫다고 칭얼대기에 그렇다면 머리만 감기겠다며 타협을 보고, 따뜻한 물을 받아둔다. 화장실에 들어와서도 계속 장난을 치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다. 아빠가 계속 씻자고 할 땐 도망가더니, 막상 내가 머리를 감기니 불편하다고 아우성이다. 계속 허우적대며 위험하게 파닥거리는 아이 머리를 후다닥 감기고, 화장실을 정리할 동안 아이를 봐달라며 거실로 내보냈다. 근데 갑자기 아이가 아빠한테 머리를 또 감겨달라고 한다. 머리는 이미 감았으니 세수랑 치카치카를 할 순서라고 남편이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는다. 계속 울고불고 머리를 감겨달라고 조르는 통에 남편이 어쩔 수 없이 물을 새로 받는다.


 남편이 머리를 물로 다시 헹궈주고 세수와 칫솔질을 시키려 하니 아이가 또 머리를 감겨달라고 한다. 가뜩이나 감기에 걸려서 코 밑까지 헐 만큼 콧물이 나는데... 남편이 이번에는 화가 나서 다시 물을 받고 머리를 거칠게 헹구니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아이를 내가 데려가서 진정시키려 하는데 남편이 화장실에서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진다. 쿵! 아이도, 남편도 넘어졌는데 아이는 엉덩이를 찧었고 남편은 어깨와 허리를 다친 것 같다. 남편은 남편대로 화가 났고 아이는 놀라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니 더 큰 소리로 운다.


 남편과도 한바탕 싸웠다. 아이가 짜증내는 와중에 나한테도 계속 거칠게 말하고 화를 내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계속 바쁘게 집안일을 같이 하고 있던 나에게 뭐 하고 있었냐고 화를 내니 나도 결국은 폭발했다. 서로 바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엄한 사람을 잡는 느낌이었다.


 싸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아이가 오히려 "아빠, 많이 아파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엄마, 같이 구급상자 가지러 가요"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웃는 아이를 보니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왜 서로의 탓을 했던 것일까. 아이의 짜증도, 남편의 짜증도, 나의 짜증도 모두 서로의 탓이 아닌데. 아이는 엄마아빠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고, 나와 남편은 아이를 잘 키우며 회사생활도 잘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피곤과 스트레스가 만든 이 상황 탓을 했었어야 하나? 그저 슬프고, 후회될 뿐이었다.


 아이를 재우러 같이 침대에 누우니, 아이가 속삭였다. "엄마, 아까 아빠가 머리 세게 감아서 무서웠어요. 하지만 아빠 사랑해요." 그 말을 들으니 그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해졌다. 최근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지금 감정을 잘 못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괜한 내 욕심 때문에 아이에게 쏟을 시간을 다른 곳으로 투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부모님이 무섭고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은데 내 아이 또한 그러면 어쩌지? 지금은 솔직하게,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치원이 뭐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