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주지"
한 교수님의 추천으로 영화 <데몰리션>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쓰고 헤드셋을 착용한 제이크 질렌할의 포스터가 인상적이어서 저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평소에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의 눈빛연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었고(<프리즈너스>와 <나이트 크롤러>를 상당히 재미있게 봤었거든요) 마침 추천도 받았겠다 싶어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검색해 감상했습니다.
사실, 포스터를 보고 영화에 호기심을 가졌었지만 정작 영화정보에 대해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영화를 볼 때에도 일부러 보기 전에 정보를 전혀 검색하지 않고 보았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어딘가 바쁘게 전화통화를 하는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와 그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내를 비춰주며 시작합니다. 통화를 끝낸 데이비스에게 아내가 집에 냉장고가 고장 난 지 오래라며, 냉장고를 고쳐달라고 투덜대는데요. 갑자기 옆 차량이 돌진하며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맙니다. 이 모든 게 영화 시작 거의 5분 내에 이뤄집니다.
교통사고로 아내는 사망했고, 데이비스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아내의 피가 얼룩진 응급실 바닥을 응시하던 데이비스는, 배가 고파져 병원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꺼내려고 하는데요. 아내를 잃은 와중에도 배가 고픈 것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판기는 돈만 삼키고, 초콜릿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데이비스는 자판기 고장에 대해 병원에 항의하지만 병원에서는 특별히 조치를 취해주지 않습니다.
데이비스는 아내의 장례식에서도 거의 감정이 사라진 채로 자리를 지킵니다. 거울에 대고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지어보기도 하죠. 그러다 문득, 고장 난 자판기에 대해 항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판기 회사에 길고 긴 컴플레인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사실, 그 편지는 자판기 고장에 대한 항의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데이비드가 어떤 상황인지를 더욱 잘 알려주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 큰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아내는 죽고 자신은 거의 멀쩡하게 살았다는 사실과, 아내가 죽었어도 슬프거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주식투자가로서 장인의 회사에 출퇴근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아내와의 첫 만남과 추억, 장인어른의 상처되는 말 등에 대해 주절주절 쓰게 되죠. 물론 그 편지에 대한 답변은 오지 않았지만 데이비드는 그렇게 몇 번 반복해서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를 읽고 고객센터 직원 캐런(나오미 왓츠)은 어느 날 새벽,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묘한 공감을 느끼며 가까워지는데요. 특히 캐런의 아들 크리스와도 가까워지면서 데이비스는 아내가 죽은 다음날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했던 회사에도 가지 않은 채 각종 기계들을 분해하거나, 건물을 철거하는 현장에서 돈을 줘 가며(돈을 받는 게 아니고) '데몰리션'에 빠집니다. '데몰리션'(demolition)은 '철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비로소 영화의 제목인 '데몰리션'이 등장하며 데이비드의 삶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데이비드는 아내가 죽었는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관찰하며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많은 조사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스트레스 중 1위를 차지한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큰 고통과 슬픔이 일종의 감정이 마비된 상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요. 주인공 데이비드의 상태를 보고,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는데요. 영어로 Alexithymia라고 하고, 감정을 인식하거나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이는 상태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라고 합니다. 이 증상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①감정을 정의 내리고 정서적 각성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②타인에게 감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③공상의 결핍과 같은 제한된 심상 처리 과정, ④자극에 대한 반응이 외부로 향하는 인지적 특징(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이 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는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아내와의 좋았던 한 때, 아름다운 추억, 아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침습적인 사고가 그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표현하기보다는 아내가 죽은 초반에는 과도하게 업무에 집착하며 멀쩡한 회사 화장실 문을 분리한다던지, 아내가 죽기 전에 배달되어 왔던 커피 머신을 분리한다던지 하며 남들이 보기에는 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죠.
데이비드는 남들이 보기에는 부유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실은 그러한 삶이 본인이 원했다기보다는 상황에 이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이비드의 컴플레인 편지에 담겨있던 여러 내용 중 첫눈에 이끌린 아내와 결혼했지만 장인어른은 데이비드를 탐탁지 않아 했다는 내용이 있었죠. 그러나 데이비드는 장인어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큰돈을 굴리며 주식투자가로서 커리어를 쌓게 되는데 아내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과연 그 일이 본인이 원하는 길이었던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기계를 분해하고, 건물을 철거하고, 크리스가 녹음해 준 록 음악을 들으면서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등 기이한 행동을 통해 오히려 그동안 눌러왔던 본능을 해방합니다.
그중 압권은 크리스와 함께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철거하는 사건인데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집의 곳곳을 데몰리션(철거)하면서 데이비드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폐허가 된 집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데요. 그 사진은 아기 초음파 사진으로, 죽은 아내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였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딸의 보험금으로 재단을 만들고 우수한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주자며 데이비드를 설득해 왔고 데이비드는 서명을 망설였는데요. 죽은 아내를 기리는 재단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에 데이비드는 캐런을 데려갔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자를 데려왔다며 화를 냅니다.
데이비드는 재단 설립에 동의하는 서류를 내며 초음파 사진에 대해 묻죠. 자리를 떠나는 데이비드를 쫓아온 장모님은 사실 그 아이는 데이비드의 아이가 아니며, 딸이 바람을 피워 임신했었음을 밝힙니다. 아마도 데이비드를 깊게 상처 주려는 말이었겠지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아내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임신 사실도 모를 정도로 아내에게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데이비드는 깨닫습니다. 그 와중에 캐런의 아들 크리스는 클럽에 갔다가 심한 폭행을 당하고, 데이비드와 캐런은 병원에 달려갑니다.
캐런은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그동안 아들과 진정한 교감을 하지 못했고, 앞으로는 더 잘할 것이며, "깨어나면 아주 혼날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위의 두 장면은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아내의 임신 사실조차 몰랐던 데이비드,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게 힘겨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함께 동거하며 아이와의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캐런 두 사람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묘지에 찾아간 데이비드. 요 며칠 차로 자신을 계속 미행하던 남자가 같은 묘지에 있는 것을 보고, 데이비드는 혹시 그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초래한 차량의 운전자였고 데이비드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오히려 데이비드는 그 남자의 정체를 듣고, 그 남자를 위로하며 더욱 홀가분해진 표정이 됩니다. 다시 차를 탑승할 때, 아내가 살아생전에 남긴 쪽지를 하나 더 발견하는데요. "비가 오면 내가 안 보이겠지만 해가 뜨면 내가 생각날걸"이라고 쓰인 쪽지를 보며 냉장고에 붙어있던 "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주지"라는 쪽지를 떠올리며 마침내 데이비드는 눈물을 흘립니다. 실은, 아내는 오래전부터 데이비드에게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며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관심을 주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이자 마침내 아내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장인어른을 찾아가는데요. 일전의 일로 화가 난 장인어른은 데이비드에게 쌀쌀맞게 대하지만, 데이비드는 아내를 사랑했었음을 고백하며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장인어른은 재단을 통해 딸을 기억하길 바랐죠. 그러나, 딸이 진정으로 그 일을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의 제안을 받아들인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바닷가에 회전목마를 설치하여 아이들이 무료로 탈 수 있도록 개방합니다. 회전목마 위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던 아내의 모습을 기억하며, 데이비드도,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모두 추억에 젖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리스는 데이비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엄마 캐런이 동거하던 남자와 헤어졌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어떤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며 거기에 가 보라고 하죠. 데이비드가 알려준 장소에 제시간에 도착하니, 강 건너편에서 낡은 건물을 폭파하여 데몰리션(철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표정이 한결 좋아진 데이비드는 그 장소에 있던 아이들과 길거리를 맘껏 뛰어다니기 시작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는 크나큰 상실을 경험한 한 남자가 현재의 자신을 데몰리션(철거)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극복하고 본연의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큰 상실을 경험할 때의 5단계, 즉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의 단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죠. 영화에서 무엇인가를 고치려면 그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서 분리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주인공 데이비드도 자신을 하나하나 분리해 보며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으며 중요한 존재를 잃어버린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통합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상실을 경험했거나 인생의 힘든 고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