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았습니다. 원작 웹툰이 있고,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스케일이 큰 재난영화로 포지셔닝하며 여름 시장 블록버스터로 홍보하는 느낌이었는데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재난영화 보다는 리얼리티, 블랙코미디 장르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코 스케일이 작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여운만을 놓고 봤을 때 말이지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영화는 우리나라의 아파트 역사에 대해 빠르게 훑어줍니다. 산업화로 주요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땅이 크지 않은 우리나라에는 '아파트'가 주거지의 표본으로 금세 자리매김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심리검사에서 자주 쓰이는 HTP 검사(HOUSE - TREE - PERSON)에 대한 강의를 들을 일이 있었는데요. 이 검사는 집, 나무, 사람을 그리게 해서 그려진 그림을 바탕으로 심리상태를 파악
하는 대표적인 투사검사입니다. 이 검사에서 집(HOUSE)은 기본적으로 주택을 의미하는데요. 최근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이 검사를 하면 '집'을 그리라고 했을 때 많이들 아파트를 그린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검사를 할 때는 '일반적으로 '집'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리세요' 라고 지시를 해 줘야 보통의 집 형태를 그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집, 주거공간 이라는 인식이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세상이 다 멸망할 것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는데 그 와중에 '황궁아파트 103호' 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파괴된 가운데 지독한 추위까지 겹쳐 아파트 밖은 그야말로 지옥이 됩니다. 살아남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초유의 재난 상황에 우왕좌왕하지만, 아파트의 안전을 위해 남다른 희생정신을 보인 '영탁'(이병헌 분)을 아파트 대표로 선정하여 나름의 규칙들을 정합니다.
아파트 대표를 선정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수결에 의해 익명 투표로 진행된 결과, 압도적으로 주민이 아닌 사람은 내보내자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실, 아파트 주민 외 외부인들 중 평소 황궁아파트 주민을 무시하고 깔보던 이웃 아파트 주민이 많다는 것이 언급되면서 외부인을 내보내고자 하는 결론의 근거가 되죠. 명화(박보영 분)와 민성(박서준 분)는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던 아이와 엄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보내는데, 아파트 밖은 처참한 상황이기에 외부인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아파트 주민과의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난 와중에 영탁은 외부인에게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가면서까지 아파트를 사수하려는 집념을 보입니다. 성공적으로 외부인들을 몰아낸 아파트 주민들은 방벽을 치고, 외부인들을 철저히 차단하며 아파트 내의 규칙을 더욱 공고하게 전파합니다.
아파트는 철저하게 기여도에 따른 배급제도를 실시합니다. 군필자인 민성을 포함해 아파트 보안과 식량 조달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는 젊은 남성들, 그리고 간호사인 명화를 포함해 치료 등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활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필품과 음식을 배분하고, 기여도가 적을수록 배급량이 적어지는 구조입니다. 영탁은 아파트의 전체적인 보안 관리, 젊은 남성들과 조를 짜서 아파트 밖으로 나가 마트 등을 수색하여 물품과 음식을 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젊은 부부인 민성과 명화는 기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그래도 생필품을 넉넉하게 배분받지만, 노약자와 혼자 사는 가구 등은 부족하죠. 한정된 자원을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한편으로는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해졌습니다. 만약 저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라면 어떨까? 자꾸만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나'와 '너', '우리'와 ''우리가 아닌', '아파트 주민', '외부인'으로 나누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또는 '우리'가) 하는 것은 정당방위이고 '네'가(또는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것은 범죄이고
부당하다.], ['아파트 주민'은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되지만 '외부인'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아파트 주민이 소유한 것을 탐내면 안 된다.] 는 가치관이 은연중에 확산됩니다. 명화는 자꾸만 변해 가는 아파트 주민들, 그리고 남편 민성이 걱정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아파트 내의 생존방식에 자꾸만 의문이 생기죠. 그리고 몰래 외부인을 숨겨주던 도균이라는 남자를 돕게 되는데, 도균은 결국 외부인을 숨겨주던 것을 들키고 아파트 사람을 비난하며 자살하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명화는 이 상황을 주도한 영탁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죠.
유난히도 많은 생필품을 습득해 온 날, 아파트 주민들은 오랜만에 잔치를 열고 풍족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즐깁니다. 바로 그 날, 아파트에 누군가가 찾아오는데 알고보니 원래 아파트에 살던 학생, 혜원이었죠. 그 학생은 영탁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영탁을 몰라보고, 아파트의 제 1 규칙을 따라 혜원은 아파트에 살 자격을 얻지만 묘하게 불편해 보입니다. 아파트 주민들과 한바탕 싸우던 혜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명화는, 혜원의 말을 듣고 영탁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됩니다.
생필품을 조달하러 먼 곳까지 다녀온 날, 불의의 사고로 아파트 부녀회장의 아들이 죽습니다. 싸늘해진 아들의 시체를 본 부녀회장 금애는 영탁을 비난하고 영탁은 벌컥 화를 내며 지금까지 영탁이 얼마나 아파트에 헌신해 왔으며, 그동안 조달해 온 생필품들을 잘만 받았으면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정신없는 분위기를 틈타 명화는 영탁의 집에서 발견한 시체와 신분증을 보여주는데 알고보니 영탁은 그 집에 살던 진짜 영탁을 죽이고 그 이름을 도용해서 여기 주민처럼 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진짜 영탁에게 사기를 당해 온갖 고생을 하며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한 남자가, 우연히 아파트를 살리기 위한 행동을 하고 처음으로 자신을 그룹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이 아파트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한 행동이 의도된 행동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에게는 난생 처음 어떤 사회의 일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자신을 그렇게 신뢰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것이 정말로 달콤한 유혹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달콤함을 계속 지속시키기 위해 '나'와 '너', 그리고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용했죠.
영탁의 정체가 폭로되고 혼란한 틈을 타서, 외부인들이 아파트에 침입해 오고 아파트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간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들을 배척하고 약탈해 왔기에 아파트 주민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민성과 명화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명화를 지키기 위해 크게 다친 민성은 죽게 되고,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 명화 홀로 남게 됩니다. 혼자 남은 명화를 우연히 발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데려가고, 그동안 아파트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배급품을 받아온 습관에 젖어 있던 명화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사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영화 속 상황을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죠.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어찌 좋을 수 있을까요. 영탁도, 민성도, 명화도, 금애도, 도균도, 혜원도 알고보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고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기에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생존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다른 가치와 충돌할 때는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나'와 '너'를 가르고, '우리'와 '우리 아닌' 사람을 분리하고 배척하는 방식은 결코 생존과 직결되지 않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처럼 나와 타인을 가르는 데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기보다 같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를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것 아닐까요.
그러나 요즘같이 무차별 범죄가 급증하고, 사람 간의 신뢰가 점점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인을 믿어보라는 말조차 조심스러워집니다. 영화를 보며, 내내 안타까웠던 것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지금 현실의 문제가 더욱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 사회가 신뢰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