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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정의를 외치다, <맨오브라만차>

고전 ‘돈키호테’가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

by KEIDY

소설 '돈키호테'는 오랫동안 사랑받는 고전으로 작가 세르반테스는 몰라도, '돈키호테'라는 이름은 대부분 알 것이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엉뚱하고 현실감각 없는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할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라만차의 기사', 즉 '돈키호테'를 의미하는 제목으로 소설 '돈키호테'가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그리고 이 뮤지컬에는 주요한 설정이 존재한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뮤지컬 내에서 본인이 창작한 소설 속 캐릭터인 '돈키호테'를 연기하는 것이다.


뮤지컬은 세르반테스가 그의 심복 산초와 함께 지하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르반테스는 세금 징수원으로, 성당에 세금을 매긴 죄목으로 지하감옥에 끌려오게 되는데 지하감옥의 실질적인 지배자 '도지사'는 세르반테스가 본인은 죄가 없다며 당당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른 법. 세르반테스는 감옥 안에 죄수들에게 본인이 쓴 책 안의 역할을 하나씩 정해주고 본인 또한 '돈키호테'를 연기한다.


‘돈키호테'(본명 : 알론조 키하나)는 원래 시골 지주인데, 은퇴 후 본인이 기사라고 착각하며 부패한 세상을 정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그를 유일하게 믿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산초이다. ‘돈키호테'는 정식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데, 풍차를 괴물로 착각하는 등(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엉뚱한 일을 벌인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어느 여인숙(술집을 겸하는...)이 영주가 살고 있는 성이라고 생각하여 정식 작위를 받으려 그 성(?)에 찾아간다.


여기에서, 알돈자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알돈자는 부모 없이 여인숙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사는 여인이다. 여인숙을 방문하는 남자들은 알돈자를 욕망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녀와 잠을 잘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며 그녀의 마음을 진심으로 얻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알돈자를 본 돈키호테는 그녀를 '둘시네아'로 부르며 현명하고 정숙한, 고귀한 레이디라고 칭송한다.


알돈자에게 돈키호테는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과, 아니 사람들과는 달랐기에 처음엔 그를 멀리하고 기피한다. 그러나 꾸준한 돈키호테의 칭송과 정성스러운 마음이 마침내 알돈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돈키호테는 원하던 기사 작위도 받는다.(비록 여관 주인에게 받은 것이지만) 그녀는 돈키호테와 함께 그녀를 괴롭히려던 남자들을 혼내주는데, 다친 그들을 돌봐줘야 한다는 돈키호테의 마음 씀씀이에 더욱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들을 도우러 갔다가 오히려 남자들에게 큰 일을 당하게 된다.


한편 자신의 결혼에 피해를 끼칠까 봐 돈키호테의 기행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조카딸은 이론과 냉철함으로 무장한 자신의 약혼자와 신부님께 돈키호테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한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알돈자는 자신을 아직도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돈키호테에게 자신은 레이디가 아니라며 소리 지르고, 조카의 약혼자는 거울을 이용해 돈키호테가 현실을 직시하도록 충격요법을 사용하여 돈키호테, 즉 알론조로 돌아온 그는 충격에 정신을 잃고 쇠약해진다.


쇠약해진 알론조를 둘러싸고 마지막 임종을 지키는 자리에서 알돈자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아 준 돈키호테의 집을 찾아와 둘시네아와 돈키호테를 기억하라며 눈물 흘린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와중에 알론조는 돈키호테로써의 모험과 둘시네아를 기억해 내고 세상을 위해 다시 일어서리라 다짐하지만 그는 죽음을 맞게 되고, 알돈자는 자신을 부르는 산초에게 자신은 알돈자가 아닌 '둘시네아'라고 정정해 주며 이야기의 막을 내린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친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재판 순서가 다가옴을 듣게 되고 도지사는 세르반테스에게 원고를 돌려주며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가 형제일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세르반테스와 산초는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면서 뮤지컬은 끝나게 된다.


돈키호테는 왜 아직까지도 이렇게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일까?


1.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에 대하여

알론조 키하나는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안타깝게 여기고, 본인이 정의를 직접 구현하는 기사가 되려 한다. 비록 남들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정의롭지 못한 시대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절대적 가치인 정의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2.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기사, 돈키호테는 알돈자를 보고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칭한다. ‘알돈자'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했고 남자들에게는 성적 노리개일 뿐이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그녀를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레이디 '둘시네아'로 재정의하면서 그녀에게는 그 이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즉, 지금까지 '알돈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그녀를 괴롭혔던 현실의 속박과 편견에서 스스로 벗어나 새로운 이름 '둘시네아'를 통해 정의롭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이름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 전의 의미 없는 삶을 버리고 새로운 의지를 갖고 살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3. 꿈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알론조 키하나는 현실적이고 냉철한 조카의 약혼자가 행한 충격요법 때문에 괴로운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 '둘시네아'의 노랫소리를 듣고 '돈키호테'로써 살았던 기억을 되찾는다. 그리고 의미 없이 살았던 알론조 키하나가 아닌, 정의를 추구하며 꿈을 좇던,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돈키호테'로써 죽는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적인 꿈을 갖고 그 꿈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 더 행복했던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를 외쳤던 돈키호테의 모습이 현재와도 많이 다르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더욱 회자가 되고 기억되는 콘텐츠가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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