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8군 카투사 부대를 2021년 7월 6일에 전역을 했다. 오늘 날짜가 2022년 4월 10일이니 전역한지 대략 9개월 정도가 흘렀다. 한국군 부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군 부대에서 나는 상당히 많은 노동을 했는데 비유하자면 미국 국방부의 9급 공무원 정도 되는 업무를 했다고 보면 되겠다.
MEMORANDOM이라고 부르는 미 국방부 공문을 작성하고, 미군 애들 오면 인터뷰 해서 서류와 프로필을 국방부 시스템에 작성하고, 미군 재계약하는 애들 행정 처리해주고, 다른 외국 부대로 배치되는 애들 PCS 서류 처리해주고 등등. (참고로 나는 캠프 험프리스 행정병이었다.)
한 마디로 진짜 ‘노동’을 했다. 엄밀하게 일은 미군에서 하지만 내 신분은 한국군 카투사니 돈 한 푼 못받고. 미군은 이등병도 300만원씩 월급을 받는데, 나는 한국인 강제징용 당해서 미군이랑 같은 노동을 해도 한국군 쥐꼬리 월급을 받았다. 즉, 동일 노동 / 징병 임금을 받았다.
그 안에서 일하다보면 이게 상당히 젓같은데, 미군은 모병제 국가라서 일을 많이 시킨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무원 시험 보고 들어온 공무원들이다. 한국군은 어차피 죄다 끌려온거라 농땡이도 피고 설렁설렁 일하는데 여기는 시험 보고 들어온 ‘찐 공무원’ 들이라 진짜 노동 그 자체를 한다.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군대에 잡혀서 노동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전역하면 일 절대 안해. 무조건 백수 할거야.” 군대를 29살에 가서 31살에 전역을 했다. 사실 이 나이면 급하게 취업을 하든, 학업을 계속 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 나이가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런데 나는 무작정 외국으로 떠났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로스쿨은 군 휴학 상태이고, 아마 자퇴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로스쿨을 자퇴 할 거면 더 늦기 전에 어느 기업에라도 개발자로 취직을 해야했다. 아니면 학과 친구들처럼 임용고시를 봐서 교사를 하던지. (내 전공은 컴퓨터교육학이다.)
공부도 노동이고, 회사 들어가서 일하는 것도 노동이니깐. 군대 전역하자마자 이런 노동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쉬고 있다. 그런데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9개월을 쉬니깐 진짜 힘들다. 친구들은 어떻게 쉬는게 힘드냐며 이해를 못하는데 진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쉬는 것도 질리고 불안해지고 힘들다.
사실, 이렇게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코인 투자를 워낙 초반부터 해서 한 20년은 일 안해도 되는 돈을 모아놓아서인데. 내가 예전에 암호화폐 책을 썼을 때 그 책을 통해 알게 된 여의도 증권사의 한 대표님이 식사자리에서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셨다.
“너무 어렸을 때 큰 돈을 번 경험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 할 수 있어.” / “사람마다 나이에 맞는 사회 생활 경험, 회사 생활 경험이 필요한데, 돈이 많으면 보통 취업을 안하고 쥐꼬리만한 그 돈 받고는 일하기 싫잖아. 그러다보면 경험이 안 쌓여. 인생 길게 보면 오히려 젊었을 때 큰 돈을 번게 나중엔 독이 될 수 있어.”
워낙 반골 기질이 강한 나여서 당시에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외국에서 몇 달을 내리 쉬면서 이것도 힘들다라는 것을 느끼니 갑자기 그 때 이야기가 떠오른다.
꼭 돈을 벌지 않더라도 노동을 하는 경험 자체가 꾸준한 수면 습관 / 꾸준한 식사 습관 / 꾸준한 인간 관계의 만남이라는 가치를 제공해준다. 돈은 부가적인 것이고 노동이 주는 저런 가치가 생각보다 개인의 행복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 생활은 ‘어디에도 내 소속이 없고’ ,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없으며’ 차라리 학교라도 다니면 ‘누군가에게 평가 받는 시험’이란 주기적인 이벤트가 있어 그것을 목표로 내가 치열하게 달려나갈텐데 그런게 없으니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다시 말해, 내 정체성은 지금 백수인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백수 정체성만 가지다보니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라는 불안감 + 아 타이밍 더 놓쳤다가는 나이 더 먹어서 커리어 좇될거 같은데 + 그냥 돈 얼마 안줘도 되니깐 생활 습관 잡을 수 있고 사람들 만날 수 있는 직업을 가질까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 사람들은 바보라서 직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백수로 살면 정체성 상실, 수면습관이나 식사습관 개 박살남, 인간관계도 단절되서 외로워짐이란 현상을 겪기에 다니는 것이었다.
- 노동이라는 것은 내 생각보다 엄청나게 신성한 것이었다. 오히려 돈을 위해 노동한다는 것은 부가적이고, 자신에 대한 정체성 확립, 긍정적 자기 인식, 꾸준하게 사람을 만남 등이 주는 부가가치가 노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라는 점을 느낀다.
군대에 있을 때만 해도 전역하고 무작정 백수가 되면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겪어보니 아니다. 결국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무작정 쉬면은 목표도 정체성도 사라져 미래가 불안해진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전제 : 돈은 상관 없다. 어차피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 적게 줘도 된다. 돈을 적게주더라도 내게 훌륭한 정체성과 노동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주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1) 임용고시 보고 컴퓨터 교사 되기
장점 :
- 애초에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수업 컨텐츠를 만드는 직업이고, 나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전공하면서 IT를 좋아했으니 이런 컴퓨터와 IT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적성에 맞을 듯 하다.
- 변호사인 법 공부와 달리 컴퓨터라는 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학문이다. 또 ADHD가 있는 나의 성향 상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마구 나오는 컴퓨터 기술 분야가 다양성이 있어 법보다는 훨씬 재밌다.
- 워라벨이 좋다. 돈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가정이니, 칼퇴근 할 수 있고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주기적으로 쉬면서 개꿀 빨 수 있다.
- 다중지능이론 검사를 해보면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활용 지능은 ‘인간친화지능’인데, 교사가 되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애들이랑 노가리 깔 수 있고.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어서 인간친화지능을 최상위로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적합하다.
- 임용고시 한 방에 합격 할 자신 있다. 인터넷고 -> 숭실대 컴공 -> 성균관대 컴교까지 10년을 컴퓨터를 공부했고 컴퓨터 자격증만 12개가 있다. 그냥 이미 모든 공부가 다 되어있다. 어차피 임용고시라 해봤자 컴퓨터 이론 시험보는건데 이 정도는 몇달 공부하면 조옷밥으로 붙을 수 있다.
단점 :
- 제약이 많은 공무원이다. ADHD가 있어서 투잡도 하고 쓰리잡도 하고 싶은데 교사 되면 공무원이라 아무것도 못하잖아. 이게 너무 크다.
- 다수의 교사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교직 생활과 문화 자체가 엄청 꼰대들이 가득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자유로운 내가 들어가는 순간 100% 상극일거라고.
- 중, 고등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애들이 너무 어려서 가르치다보면 어느 순간 현타가 온다고. 생각과 가치관이 워낙 다르다고 한다.
- 변호사와 달리 그만두는 순간 내 직업이 아니게 된다. 즉, 평생 귀속되는 정체성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이를 최대한 상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아야 하는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내가 과연 정년 때까지 교사를 할 수 있을까.
2) 로스쿨 복학하고 빡세게 공부 노동해서 변호사 되기
장점 :
- 변호사는 평생 귀속 자격증이다. 한번 라이센스를 취득만 하면 100살 사망 시까지 나는 평생 변호사다.
- 교사나 IT 사업, 대기업 취업 등은 그냥 그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나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전 직장일 뿐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평생 정체성을 안겨주는 직업이다.
- 무엇보다 개 간지난다. 그냥 끝판왕 슈퍼 간지다.
- 따는 순간 N잡러가 가능하다. 비영리단체에서 근무하다가, 컴퓨터 해킹 사건 변호도 하고, 잠깐 변호사 쉬고 컴퓨터 사업도 하고. 자유로운 내 성향에 맞게 N잡이 가능해진다. 전문직이고 라이센스 자체가 소속이라 제약이 없다.
단점 :
- 컴퓨터 공부 VS 법 공부를 비교하면, 법 공부 진짜 조올라게 재미없다. 공부하는 과정이 너무 빡세다.
-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50% 내외라서 로스쿨 공부 하는 내내 불합격에 대한 불안함에 떨면서 공부해야 한다. 오탈자가 워낙 많다는 사실이 시험 합격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란 스트레스를 상당히 안겨줄 듯 하다.
- 이미 실업계 고교 시절부터 10년이나 쌓아올려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컴퓨터와 다르게 법은 진짜 쌩판 처음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문과 출신이 아닌 이공계 출신이라 공부에 있어 불리하다. 이미 10년이라는 시간이 투자가 된 컴퓨터와 달리 시간 투자가 전혀 안되어 있다.
- 솔직히, 돈 벌 생각은 꿈 깨야 한다. 매일 아픈 사람이 넘치는 의료 시장과 다르게 법조 시장은 규모가 너무 작다. 아직까지는 변호사들이 밥 안 굶는다고 하나 근 미래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 어차피 변호사 자격증 따도 일종의 명예직이고 나는 이 라이센스를 바탕으로 변호사라는 타이틀 달고 이 마케팅 효과로 IT 사업을 해야 한다.
3) 대기업 취업하기 (삼성전자나 카카오 등)
장점 :
- 친구들 말로는 들어가면 컴퓨터 코딩 실력은 졸라게 늘어난다고 한다. 그만큼 일을 엄청 시키고, 실용적인 업무를 많이 시킨다.
- 아무래도 이공계다 보니 교사보다는 돈을 많이 준다. 사내변 기준으로는 변호사하고도 비슷하게 연봉을 줄 듯.
- 능력있고 실력있는 동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단점 :
- 워라벨이 없다. 이게 진짜 큼
- 나중에 그만두면 끝이다. 평생 귀속 자격증이 아니다. 40대 중반에 짤리면 그 나이에 재취업하기도 힘들고 치킨 튀기러 가야 한다.
- 대기업 다니는 애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회사가 주는 안정성이 포근해서 사람을 도전적이지 않게 만든다고.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주어진 일만 하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으니 업무 능력 향상 외에 나 자신의 성장은 정체되는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돈도 많이 주고 루틴화 된 삶을 살아가니 어느 순간 사육 당하는 수준으로 포근해진다고 한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음.
4) IT 분야 창업하기
장점 :
- 내 성격에 맞게 자유롭다.
- 내 적성에 맞게 창의력을 요하고 돈이 되는 아이디어를 요한다.
- 나름 간지는 남. 스타트업 CEO라고 자위하면서 정체성 뽕 맞을 수 있음.
- 오로지 내수와 로컬만 상대해야 하는 교사, 변호사와는 다르게 카투사에서 배운 영어 실력을 살려서 글로벌 비즈니스가 가능하다. 즉, 해외를 상대로도 먹고사니즘을 실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 코인 초기 투자에 성공한 경험을 살려 초반에는 블록체인 쪽 사업을 할 것 같다. 즉 나름의 짬밥과 내공이 있다. 그랬을 때 롤모델은 테라의 신현성 대표나 코인원의 차명훈 대표다.
단점 :
- 초반에는 돈이 없으니 그동안 모아놓은 돈 까먹어야 한다.
- 분야는 블록체인이기는 해도 현재 딱히 하고 싶은 아이템도 마땅히 없다. 그냥 정체성과 신분을 위한 창업인데 이게 맞나 싶다.
- 이게 가장 큰 단점인데, 교사나 회사는 알아서 생활습관, 수면습관, 업무 시간 다 잡아줘서 편하게 따라다니면서 노동하면 된다. 그런데 이건 내가 하나부터 끝까지 알아서 다 해야 한다. 나는 이걸 일명 X같은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가 절대 좋은게 아니다. 이런 자유는 지금 백수에서도 누리고 있는데 딱히 하는게 없지 않은가? IT 창업을 한다고 해도 정체성 확보 외 생활 습관 실무에서는 달라질 건 없다는 뜻. 나는 생각보다 수동적인 인간이다. 누가 시켜야만 하고,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
그 외에도 컴퓨터 학원 강사, 아프리카 스트리머 BJ나 유튜버 등이 있지만, 이건 그냥 취미 수준에서 해야 하는 일인거지 내 평생을 좌우하는 귀속 정체성이 되는 직업과 신분이 될 수는 없단 생각이다.
시바.. 한 마디로 졸라 불안하다. 사람들이 이 정체성의 혼란, 소속감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기를 쓰고 그렇게 취업을 하고 어디에라도 들어가려고 하는구나. 나에게는 29살까지 “어차피 군대 가니깐” 이란 보험이 있어서 이걸 못 느끼고 살았다. 그런데 군대를 전역한 지금 이제 내 앞에는 이 핑계거리가 사라져버렸다. 즉, X같은 자유, 광활한 대지가 내 커리어에 펼쳐졌다. 나는 앞으로 어떤 노동을 해야 하나.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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