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노력을 하는가? 늦은 시간에 도서관에 가보면 졸음과 싸우며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거리 한복판을 걷다보면 자정이 다 되도록 퇴근을 못하는 직장인이 가득하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거야? 무엇을 위해서?”
이 질문에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을 하고, 누군가는 “자아실현”을 위해서라는 다소 거창한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런데 사실 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명확한 정답을 내놓았다. “바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열심히 살아가는 근원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위들이 우리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타인을 의식하는 행동이라고 보고 있다. 작게는 세수를 하든 행동부터 (나 빼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 때도 과연 세수를 할까?) 크게는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행동까지 지켜 볼 사람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으면 애초에 성립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타인이 가까운 가족 일 수도 있고, 아직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 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무의식에 있는 그 사람이 누구든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선사하는 인정은 내가 어떤 것에 노력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일례로, 어떤 사람이 글자를 거꾸로 읽는 것에 비범한 재능이 있다고 하자. 유튜브에 나와서 순식간에 문장을 거꾸로 읽기도 하고, 관련된 노하우를 책으로도 출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분명 신이 준 천재적인 재능의 일종인데 모두가 이 재능에 관심이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이 재능에 만족 할 수 있을까? 거의 대부분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명료하다. 재능은 남들이 인정해주기 때문에 재능인 것이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재능은 애초에 우리 사회에서 재능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실제 여러분은 이런 재능을 이미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니 인생에서 하등 쓸모가 없을 뿐.) 이런 인정받지 못하는 재능을 갈고 닦을 시간에 남들이 인정해 줄 가능성이 높은 성취에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판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학술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 1995년 심리학 저널에 발표된 위 논문도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며 모든 동기부여가 이곳에서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의 영역에서나 그렇다. 우리의 일상에서 작용하는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인정을 멋있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함) 추구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것은 우리가 극단적인 사회성을 이루는 동물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내가 이런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자 무언가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 가족 / 친구 /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대중.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걸 부정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물론 현실성 없는 비과학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구나"
결국 ‘사람’이라는 주제가 키워드였다. 모든 행동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인정을 주는 사람(타인)에 대한 인문적학 공부. 그것이 필요했다. 그렇게해서 살펴 본 다른 논문이 있다.
주제는 이렇다. 세상에는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타인을 대할 때 정말로 내향적인 사람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진짜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일까?
결과는 놀랍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편견을 벗어나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모두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람들과 어울릴 때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흔히 내향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타인과 어울릴 때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과 다르게 두 비교 집단이 사람을 만날 때 느껴지는 쾌락의 정도는 다르지 않았다. 즉,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 못지 않게 타인과의 만남을 즐거워했다.
이런 결과는 내향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람을 덜 찾는 이유가 사람 자체가 싫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충격적인 결과가 나타나자 학자들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분명 뇌의 쾌락 중추가 활성화 되고, 즐거움도 느끼는데 내향적인 사람들은 왜 타인을 안 만나는 것인가?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학계에서 밝혀낸 이론은 이러하다. 외향적인 사람들과 내향적인 사람들 모두 타인을 만날 때 큰 즐거움과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나 외향적인 사람들은 즐거움 자체를 추구하며 그것에 반쯤은 미쳐있고 , 내향적인 사람들은 즐거움을 거부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이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르는 핵심적인 척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학자들은 외향적인 사람이 (자극 추구형 인간) 어떤 일이든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자극엔 한계가 있기에 여러 사람들을 계속 만나면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려 했고, 꼭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일이든 취미든 어떤 것을 하든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대학 입학 이후 나는 외향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 외향적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자극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인지했다. 돌이켜보면 공모전을 40개 넘게 도전했던 이유도 새로운 자극을 계속해서 찾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고. 전공에 있어서도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가 교육학을 전공했다가 졸업 후 뜬금없이 로스쿨에 진학 한 것 모두 새로운 자극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랬었다.
카투사 전역 이후 4개월 정도 쉬었는데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는 이유도 나는 쉬는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다. 매일 매일 새로운 자극이 일어나야 되는데 가만히 쉬면서 책이나 읽으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는 느낌이다. 이런 생활은 나처럼 자극추구형 인간(외향적인 사람)보다는 자극비추구형 인간(내향적인 사람)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또한, 나는 잘하는 것이 있어도 끈덕지게 그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왜? 내가 잘하는 것과 별개로 지루했으니깐. 어떤 일을 하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아 이제 잘해졌네? 지루해… 하고 쌩판 처음부터 공부해야 하는 다른 일을 찾으러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로스쿨이다. 그런데 또 막상 들어가서 공부하다보니 처음에는 재밌다가도 금방 지루해져서 뭐 새로운 것 없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상화폐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 분야는 매일 새로운 자극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곳이기에 그랬다. 이 판은 진짜 자극적이거든.
또 나는 누굴 만날 약속이 없으면 어떤 일이든 힘 없이 대충하다가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하는 일이 닥치게 되면 갑자기 뇌가 핑핑 돌아가면서 집중력과 에너지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 이번주 수요일 저녁에 갑자기 약속이 생겼는데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인지하니 자극을 받아 아침까지는 안됐던 일이 오후에는 집중이 잘되는 현상을 겪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계속해서 자극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맨 위에서 열거한 타인의 인정을 위해. 이것만큼 짜릿한 자극은 또 없으니깐. 수 많은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타인이 주는 자극은 어마무시하다. 이런 나의 속성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그동안 계속해서 축축 처지고 어딘가 잘못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내 뇌 사용설명서’가 있는데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살았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시 자극을 추구하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