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지음, 후마니타스
터미날, 아파트, 고층빌딩, 고속터미날, 주상복합건물.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 조정진 선생의 일터다. 그가 일한 곳들은 그를 경비원으로 채용했지만 그가 하는 일은 감시 경계 업무만이 아니다. 그가 일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제반 기타 업무가 그의 몫이었다. 온갖 생활쓰레기를 분류하고 음식물 수거함을 닦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밤새치우고 낙엽을 쓸고 가지치기를 하고 출퇴근에 들고 나는 자동차들이 막힘 없이 오가도록 관리하고 때로는 오수 정화조 부식으로 흘러나온 똥물을 퍼내야 한다. 고층빌딩에서는 지하6층에 이르는 지하주차장에 가득찬 미세먼지와 배기가스 속에서 주차관리를 하고 한 시간 안에 30층에 이르는 건물의 순찰을 돌아야 한다. 고속터미날에서도 마찬가지다. 핀셋을 들고 다니며 보도블럭 사이에 낀 이쑤시개를 줍고 터미널 주변의 정체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고, 한밤중에 도착한 버스들이 플랫품에 주차하지 않도록 기사들과 실갱이를 해야 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가 일한 곳들은 24시간 격일제로 고용했다. 그가 사용자와 계약한 24시간에는 식사 시간과 수면시간이 무급 휴게시간으로 포함되어 있었지만, 경계와 감시라는 업무의 특성으로 혹은 과중한 업무로 무급 휴게시간에도 쉴 수 없었다. 업무에 필요한 장비, 하다못해 목장갑마저도 지급하는 곳은 없었다. 식사와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아예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너무 열악했다. 업무에 대한 보상은 최저임금이 전부였다. 일을 하다 다치더라도 치료는 물론 무급 휴일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작업장에서의 사고마저 그 즉시 해고로 이어졌다.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조정진 선생이 직접 일터에서 적어왔던 글을 묶은 것이다. 조정진 선생의 일터에는 은퇴 후에도 노동을 멈출 수 없는 고령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이 현장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 낮은 임금, 과중한 업무, 손쉬운 해고는 고령 노동자들의 일터를 노역장으로 만든다. 그 노역에는 모멸에 대한 감내도 포함된다. 쉽게 쓰이고 쉽게 해고당하는 임계장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입주민의 심부름이나 언어폭력을 감내한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 대신 욕받이가 되어 민원을 상대하는 것도 그들의 '기타 제반 업무'다. 그렇게 모멸을 받아내도 보험회사의 본부장과 그 가족, 부장과 그 가족들의 주차위반을 단속했다하여 시말서를 써야 하고 끝내는 해고된다.
책을 읽으며 날카로운 것에 베이는 것 같은, 통증조차 없는 냉기 같은 것이 내내 머리와 몸을 훑고 지나간다. 고령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에 대한 연민이나 그들에게 쏟아지는 모멸에 대한 분노 혹은 자책이 아니다. 아파트, 터미널, 고층빌딩 등등 조정진 선생과 그의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공간들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다. 어느 한 곳 내 일상의 경로와 겹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이 시급을 받으며, 무급 휴게시간까지 노동하면서, 쓸고 닦고 치우고 돌보는 공간들을 나는 쾌적하게 사용한다. 혹은 조금의 불편함이 눈에 띠면 사용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이를 지적한다. 내가 사용하는 공간의 쾌적함이 어떠한 노동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이 노동자로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날카롭게 베이는 냉기는 무지에 대한 반성과 각성만은 아니다. 그와 그의 동료 임계장이 내몰려 있는 낮은 임금과 과중한 업무, 손쉬운 해고 그리고 모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 삶 안에 촘촘히 박혀 있는 어느 공간이 노동 없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른 비용을 제공하는 규칙-법이든 관습이든 혹은 인정이든-은 없었다. 노동을 위해서는 쉬어야 하고 쉬기 위해서는 쉴 수 있는 공간, 몸을 안정적으로 이완할 수 있는 공간과 몸과 정신이 공격받지 않을 청결한 공간이 있어야 하며 쉬는 동안에도 생존이 내몰리지 않을 비용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존중도 아니고 인간존중도 아니다. '존중'이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 받을 때 당연히 따라야 할 ‘조건’이다. 왜? 인간의 노동력은 그렇게 재생산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경영 합리화, 노동유연성이라 불리는 복잡한 인력구조 속에서 이러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지워지고 노동을 제공받는 어느 누구도 그 ‘조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최저시급, 임시 계약직 등 불안정한 계약관계일수록 이 '조건'은 표백되다시피 지워져버린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노동을 제공하는 당사자들에게 떠넘겨지졌다. 결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갈아넣으며 생존을 위해 노동한다. 그리고 노동의 ‘조건’이 지워지니 이들이 노동자라는 사실,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지워지고 만다. 모멸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임계장 이야기>는 우리의 쾌적한 공간들이 어떻게 노동의 조건을 지우고 노동을 지우고 인간을 지우고 지탱되는가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입주민 대표가 갑질을 멈추고, 본부장이 화풀이를 하지 않고 감독관이 친절하게 응대한다고 노동에서 인간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친절이나 연민이 아니라 지워진 노동의 조건을 회복할 때 노동이 드러나고 노동자가 드러나고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이 드러난다.
책을 읽는 내내 베이는 냉기가 찌르르 몸을 훑어 내리는 한편,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벅차기도 했다. '육성'이란 이런 것일까. 노동의 현장에서 당사자가 빼곡이 적은 '글'들이 마음과 몸을 울린다.